▲도토리들은 사나흘 동안 물에 담가둬야 됩니다. 그래야 나중에 짝짝 잘 벌어집니다.이승숙
내 고향 청도에서는 도토리를 꿀밤이라 불렀다. 어쩌다 한번씩 맛보는 꿀밤묵은 약간 떨떠름했다. 매끌매끌하고 탱탱한 꿀밤묵을 젓가락으로 조심스레 집어 올려서 양념장에 찍어서 먹으면 씹을 사이도 없이 저절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곳 강화에서 맛보는 도토리묵은 우선 색깔부터가 달랐다. 경상도식 꿀밤묵은 초콜릿 색깔이었는 데 반해 강화 도토리묵은 색이 아주 연했다. 그리고 꿀밤묵 특유의 떨떠름한 맛과 향이 많이 가셔지고 대신 매끈하고 깔끔한 맛뿐이었다. 나는 꿀밤묵이 먹고 싶었지 도토리묵에는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참나무로 둘러싸인 집에 살면서도 도토리를 한 번도 줍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올해는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직접 도토리묵가루를 내보겠다는 당찬 결심을 했다. 경상도식으로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욕심을 내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그랬다.
"여보, 우리 도토리 줍자."
남편은 이게 웬 횡재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바로 양동이를 챙겨서 집 뒤안으로 갔다. 우리 집 뒤안에는 도토리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 여보. 우리 경상도 식으로 한 번 만들어 보자. 강화도 사람들은 도토리를 갈아 와서 물에 너무 많이 헹궈서 떫은맛이 다 달아나는 거야. 우리는 좀 덜 헹궈서 떨떠름하게 만들어 보자."
남편은 그리 말하며 허리를 굽혀 도토리들을 줍기 시작했다. 주운 도토리는 물에 담가뒀다. 그냥 두면 금방 벌레가 파먹어 버린단다. 그래서 물에 담가뒀다.
도토리를 물에 담가두는 것은 벌레가 파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도토리 가루를 내기 위해서는 도토리 껍질을 다 벗긴 다음에 방앗간에 가서 빻아 와야 한다. 그런데 도토리 껍질은 야물고 단단해서 그냥은 잘 까지지 않는다. 그래서 도토리들을 물에 담가 두는 것이다. 물에 담가 두면 붇기 때문에 나중에 껍질 까기가 쉬워진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삼사일 동안 물에 불린 도토리를 건져서 햇볕에 바짝 말려야 한다. 그러면 도토리들이 짝짝 갈라진다. 이렇게 벌어진 도토리들을 하나하나 일 삼아서 다 깐다. 도토리가 많을 경우엔 기계로 까겠지만 우리처럼 양이 얼마 안 될 경우엔 하나하나 손으로 다 까주는 거다.
도토리 묵가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도 몇 번의 과정이 더 남아 있다. 방앗간에서 빻아온 가루를 물로 헹궈내고 앙금만 받아서 또 말리는 과정들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