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도토리는 왜 안 벌어지지?

떨떠름한 도토리묵 한번 먹어보자고 이게 왠 고생이냐

등록 2006.10.29 12:07수정 2006.10.30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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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여기 온통 다 도토리네. 언니, 우리 도토리 좀 줍자."


이웃 동네에 사는 재호 엄마랑 어디 놀러간 길이었다.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집을 짓고 마당을 아주 근사하게 꾸며놓고 사는 집이 있는데 내가 재호 엄마에게 그 집을 구경시켜 줄려고 데려간 참이었다. 그런데 재호 엄마는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탄성부터 지르며 도토리 줍기에 바쁘다.

"도토리 그거 어느 세월에 다 주울라꼬? 짜잘한 기 주워봤자 붓지도 않겠다."
"아냐 언니, 이거 잘 불어. 잠시만 주우면 한 대야는 줍겠다. 언니, 우리 이거 주워서 도토리묵 해먹자."

참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그 곳엔 아닌 게 아니라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쪼그리고 앉아서 도토리를 줍기 시작했다.

땡글땡글한 도토리들이 여기저기에 막 떨어져 있습니다.
땡글땡글한 도토리들이 여기저기에 막 떨어져 있습니다.이승숙
몇 년 전부터 가을만 되면 남편은 노래 아닌 노래를 불렀다.

"여보, 우리 도토리묵 해먹자."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묵살해 버리곤 했다. 도토리묵가루 만드는 일이 엄청 고되다고 들었기 때문에 못 들은 척한 것이다.

우리 집은 커다란 참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투두두둑 도토리들이 떨어져 내린다. 개밥을 주려고 집 뒤안(뒤꼍)으로 나가보면 도토리들이 떨어져 있다. '개밥에 도토리'라더니 진짜로 개밥 그릇에도 도토리가 떨어져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도토리를 줍지 않았다.


내가 도토리를 줍지 않았던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일이 많다는 거였다. 도토리 묵가루를 만들려면 공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러 날 공력을 들여야 만들 수 있는 게 도토리 묵가루라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포기해 버리고 단 한번도 시도를 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도토리묵가루 만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 도토리묵이랑 메밀묵을 먹고 자랐는데도 나는 묵가루를 만드는 여러 과정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해보지 않았더라도 하는 것을 보고 자랐으면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 볼텐데 내 기억 속에는 묵가루 만드는 과정이 전혀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묵가루 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 다음 이유는 좀 다른 데 있었다. 강화도에서 나오는 도토리묵가루로 묵을 만들면 어릴 때 먹어봤던 그 도토리 묵 맛이 나지 않는 거였다. 도토리묵 색깔부터 다르고 맛도 달랐다. 나는 경상도식 도토리묵은 좋아하지만 경기도식 도토리묵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나무 자체가 서로 달라서 묵 맛이 다를 거라고 했다. 도토리묵을 만드는 열매는 참나무 열매인데 참나무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했다. 상수리 나무도 있고 신갈나무도 있고 또 무슨 나무도 있는데 아마도 나무 종류가 달라서 그럴 거라고 그랬다.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았다. 그러니 내가 애써 묵가루를 만들어봤자 고향 냄새가 나지 않을 게 뻔한 일인데 뭐 하러 그 고생하며 묵가루를 만들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거였다.

도토리들은 사나흘 동안 물에 담가둬야 됩니다. 그래야 나중에 짝짝 잘 벌어집니다.
도토리들은 사나흘 동안 물에 담가둬야 됩니다. 그래야 나중에 짝짝 잘 벌어집니다.이승숙
내 고향 청도에서는 도토리를 꿀밤이라 불렀다. 어쩌다 한번씩 맛보는 꿀밤묵은 약간 떨떠름했다. 매끌매끌하고 탱탱한 꿀밤묵을 젓가락으로 조심스레 집어 올려서 양념장에 찍어서 먹으면 씹을 사이도 없이 저절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곳 강화에서 맛보는 도토리묵은 우선 색깔부터가 달랐다. 경상도식 꿀밤묵은 초콜릿 색깔이었는 데 반해 강화 도토리묵은 색이 아주 연했다. 그리고 꿀밤묵 특유의 떨떠름한 맛과 향이 많이 가셔지고 대신 매끈하고 깔끔한 맛뿐이었다. 나는 꿀밤묵이 먹고 싶었지 도토리묵에는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참나무로 둘러싸인 집에 살면서도 도토리를 한 번도 줍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올해는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직접 도토리묵가루를 내보겠다는 당찬 결심을 했다. 경상도식으로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욕심을 내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그랬다.

"여보, 우리 도토리 줍자."

남편은 이게 웬 횡재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바로 양동이를 챙겨서 집 뒤안으로 갔다. 우리 집 뒤안에는 도토리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 여보. 우리 경상도 식으로 한 번 만들어 보자. 강화도 사람들은 도토리를 갈아 와서 물에 너무 많이 헹궈서 떫은맛이 다 달아나는 거야. 우리는 좀 덜 헹궈서 떨떠름하게 만들어 보자."

남편은 그리 말하며 허리를 굽혀 도토리들을 줍기 시작했다. 주운 도토리는 물에 담가뒀다. 그냥 두면 금방 벌레가 파먹어 버린단다. 그래서 물에 담가뒀다.

도토리를 물에 담가두는 것은 벌레가 파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도토리 가루를 내기 위해서는 도토리 껍질을 다 벗긴 다음에 방앗간에 가서 빻아 와야 한다. 그런데 도토리 껍질은 야물고 단단해서 그냥은 잘 까지지 않는다. 그래서 도토리들을 물에 담가 두는 것이다. 물에 담가 두면 붇기 때문에 나중에 껍질 까기가 쉬워진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삼사일 동안 물에 불린 도토리를 건져서 햇볕에 바짝 말려야 한다. 그러면 도토리들이 짝짝 갈라진다. 이렇게 벌어진 도토리들을 하나하나 일 삼아서 다 깐다. 도토리가 많을 경우엔 기계로 까겠지만 우리처럼 양이 얼마 안 될 경우엔 하나하나 손으로 다 까주는 거다.

도토리 묵가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도 몇 번의 과정이 더 남아 있다. 방앗간에서 빻아온 가루를 물로 헹궈내고 앙금만 받아서 또 말리는 과정들이 남아 있다.

물에 불린 도토리를 햇살에 말리면 요렇게 짝짝 벌어집니다. 어떤 놈들은 옷을 홀라당 벗었네요.
물에 불린 도토리를 햇살에 말리면 요렇게 짝짝 벌어집니다. 어떤 놈들은 옷을 홀라당 벗었네요.이승숙
이렇게 일이 많으니 누가 도토리 묵가루를 만들겠다고 나서겠는가. 그냥 한 봉지 사면 되지 뭐 하러 이런 과정들을 힘들게 하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나도 그동안 단 한 번도 도토리 묵가루 만들 생각을 안 했던 거다.

젊은 사람들은 묵가루 내는 일을 기피하는 데 비해 나이든 분들은 묵가루 내는 일을 어렵다 생각지 않는 것 같다. 그 분들은 가을만 되면 배낭 하나 둘러메고 산으로 도토리 주우러 간다. 도토리가 한 자리에 많이 떨어져 있는 거도 아닌데 그 분들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 헤매면서 도토리들을 주워온다. 그리고 도토리 묵가루를 만든다.

젊은 사람들은 귀찮고 힘든 일들은 안 하려고 한다. 나부터도 그렇다. 그깟 거 한 되 사먹고 말지 뭐 하러 힘들게 하냐는 식으로 치부해 버린다.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차 마시고 놀러 다닐 시간은 있어도 차분하게 집에 앉아서 도토리 묵가루 낼 시간은 없다. 시간은 많지만 도토리 묵가루 낼 시간은 없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다.

그래서 남편이랑 아들아이가 도토리 묵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묵가루 만들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거 한 되 사먹으면 되지 뭐 하러 만드냐는 마음으로 단 한 번도 만들어 보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았다. 시간이 없다, 하기 싫다 생각하면 늘 시간은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내기가 어렵지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데 마음만 먹으면 이미 반은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일 거 같았다.

물에 담가두었던 도토리들을 건져서 마당에 늘어놓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우리 집 도토리들은 벌어지지가 않는다. 같이 도토리를 주웠던 재호 엄마네는 벌써 도토리들이 다 벌어져 가던데 왜 우리 집 도토리들은 벌어지지 않을까. 아침에 늘었다가 저녁에 걷어줘야 하는 걸까? 이슬을 맞히면 안 되는 걸까? 혼자 속으로 온갖 궁리를 해본다.

'하나하나 물어가면서 하다보면 도토리 묵가루 비슷한 게 만들어지겠지. 올해는 그럭저럭 흉내만 내겠지만 내년에는 조금 더 잘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우리 집 식구들에게 내가 만든 도토리 묵가루 맛을 보여 줄 수 있겠지.'

난 이 생각으로 오늘도 난 마당에 늘어놓은 도토리들을 살펴본다. 그나저나 왜 우리 집 도토리들은 벌어지지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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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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