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구 선수가 아니라 무림고수들이야"

<오마이뉴스> 족구대회 참가한 남편, 몸살로 드러눕다

등록 2006.10.30 16:14수정 2006.11.0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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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중한 실력을 가진 족구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시민기자족구팀
출중한 실력을 가진 족구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시민기자족구팀김혜원

"에고고 나 죽겠다. 팔, 다리, 어깨, 허리 안 아픈 데가 없네. 파스 좀 가져와 봐라."
"족구대회에서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거 봐요, 아빠 나이엔 족구가 무리라니까. 엄마가 좀 말리지… 하하하."
"야 임마, 놀리지 말고 파스나 잘 붙여. 그래도 아빠 팀이 일승은 했다. 전패는 아니란 말야. 자식, 아빠가 족구 하는 걸 봤어야 하는데… 당신이 말 좀 해줘. 나 잘 했지?"


지난밤 잠자리에서도 '에고고, 에고고' 앓는 소리를 하던 남편이 드디어는 파스를 찾습니다. 군대 시절 이후 근 20년 만에 족구장에 다시 선 남편. 실력만큼은 군대 시절 못지 않을 거라며 아들에게 큰소리를 빵빵 치더니 족구시합 후유증으로 앓아 누운 것입니다.

<오마이뉴스> 덕에 20년 만에 족구시합을 하게 된 남편은 시합 며칠 전부터 소풍가는 어린애처럼 들떠 있었습니다.

"미리 만나서 한 번 발을 맞춰봐야 되는데… 연습도 해보고… 아무리 참가에 의의가 있다고 해도 너무 못하면 창피하잖아."
"내가 이래봬도 군대 시절엔 막을 자가 없는 공포의 스트라이커였다고. 내 발바닥 슛을 막아내는 사람이 없었어."

아들은 아빠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설마~'를 연발했고, 남편은 '설마~'를 연발하는 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멋진 시합을 보여주겠다며, 두고 보라고 큰소리를 빵빵 쳤습니다.

멋진 예선탈락이 목표였는데 상대팀 불참으로 1승 거둬


족구 시합을 하러 가는건지? 모내기를 하러 가는 건지?
족구 시합을 하러 가는건지? 모내기를 하러 가는 건지?김혜원

시합이 열리는 10월 28일 오전 9시. 경기 1시간 전임에도 경기가 열리는 난지물재생센터 족구경기장에는 이미 여러 팀들이 나와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전국철거민협의회 족구팀 응원단의 흥겨운 사물놀이 가락과 아이들을 데리고 응원 나온 가족들의 즐거운 모습이 축제 분위기를 더 해줍니다.

한 번도 발을 맞춰보지 않았던 시민기자팀은 당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선수들과 첫인사를 하고 처음으로 발을 맞춰 봅니다. 대부분의 참가팀들이 꾸준한 연습과 시합을 통해 발을 맞추는 것은 물론 응원구호와 기합소리까지 충분히 트레이닝 되었다면, 시합 전에 급조(?)된 시민기자팀의 경우는 서로의 얼굴조차 시합장에서 처음 볼 정도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팀이었습니다.


반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족구시합 규정조차 몰라 긴 바지를 허벅지까지 둘둘 말아 올려 비닐 끈으로 묶었습니다. 마치 논에 모심으러 가는 모양으로 시합에 나가는 바람에 웃음을 자아냈을 정도입니다.

다른 팀들이 얼마나 연습을 많이 하고 잘 훈련이 되었는지에 상관없이 당일 날 시합장에서 처음 만나 잠깐 동안 발을 맞추어 본 시민기자들도 시합에 나가는 기상만큼은 다른 팀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이기겠다는 기상이 아니라 멋지게 지겠다는 기상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입니다.

"이기려고 애쓰지 말고 즐깁시다. 어차피 우린 예선탈락이 목표니까 멋지게 탈락하고 뒷풀이나 즐기자고요."
"네, 그러시자고요. 부담 갖지 말고 편히 하시자고요. 우린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멋진 시민기자팀이니까요."

이렇게 첫 경기부터 의연하게(?) 패배를 준비하고 있던 시민기자팀에 예상치 못했던 낭보가 날아듭니다. 첫 경기의 상대팀이 불참한 관계로 싸워보지도 않고 1승을 얻게 된 것이지요.

"우리 1승이래요."
"우하하하. 이렇게 도와주네. 우리 이러다가 16강 가는 거 아닌가 몰라. 16강 가면 뒷풀이에 지장 있는데."
"그러게요. 우리 다음 팀 전력을 모르지만 약 팀이라면 16강 못 가라는 법도 없지. 그러면 큰일인데 하하하."

영스타 팀에 2대 0으로 참패당한 시민기자팀

아들아, 아빠의 강 슛 실력을 보여주마.
아들아, 아빠의 강 슛 실력을 보여주마.김혜원

첫 경기부터 패배를 예상하고 승부에 큰 욕심을 보이지 않던 시민기자팀의 팀 분위기는 운 좋게 얻은 첫 부전승으로 인해 '이겨보자', '한 번 해보자', '못할 것 없다'라는 분위기로 급반전합니다. 1승을 축하하는 의미로 미리 준비해 간 진주 막걸리와 흑산도 홍어까지 한 점 씩 하더니 급기야는 '준우승'까지 운운해가며 호기를 부립니다.

막걸리의 기운인지 홍어의 힘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시민기자팀의 목표가 예선탈락이 아닌 16강으로 변경되는 순간 이들의 눈앞에는 정말 16강이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막상 16강에 앞서 치러야 할 단 한 판의 승부에서 시민기자팀은 평균 연령이 열 살은 젊은, 팀 이름조차 엄청 젊어 보이는 ‘영스타’팀에 2대 0으로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첫 세트 15 : 1, 두 번째 세트 15 : 5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펄펄 나는 상대팀에 주눅들은 시민기자팀은 허벅지에 묶은 나일론 끈 한 번 제대로 다시 매어볼 새 없이 순식간에 참패를 당한 것이지요.

"아빠도 족구를 좀 하지만 그 팀은 장난 아니더라. 완전 새팍타크로야. 한 손으로 땅을 짚고 거꾸로 내려꽂는데 그런 슛을 어떻게 막아. 내가 군에서 족구 할 땐 그런 기술은 없었거든."
"그 친구들은 족구 선수가 아니야. 완전 무림고수들이라니까. 족구가 아니라 무공을 보는 것 같아. 그래도 0패는 안 했어. 6득점은 했다니까. 그래도 다들 아빠한테 잘 한다고 했어. 안 그래 여보? 아들에게 말 좀 해줘."
"그래 아빠 말이 맞아. 네가 봤어야 하는데. 아빠가 정말 펄펄 날더라. 체중이 좀 나가고 나이가 좀 들어서 그렇지 그만하면 잘 한 거야. 다들 잘 한다고 했어."

누가 봐도 확연한 실력 차이에 발 한 번 제대로 들어보지 못하고 참패했지만 남편은 그나마 우승후보인 강팀을 만나 6득점을 한 것도 대단한 것이라며 아들에게 자랑이 늘어집니다. 하기야 오십이 낼모레인 나이에 몸을 사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들이대는 정신만으로 보자면 우승 후보 감이긴 합니다.

남편의 행복한 표정... 내년에는 멋진 실력으로

예선 탈락 후 홍어와 막걸리를 벗삼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예선 탈락 후 홍어와 막걸리를 벗삼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김혜원

"우리는 참가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한 거야. 원래부터 예선 탈락 후 친목도모 뒷풀이가 목표였거든. 그래도 오마이뉴스 기자와 인턴, 시민기자 이렇게 세 팀이 한 리그에서는 2등을 했다. 대학생 인턴기자팀에게 1세트 승리 후 체력이 딸려 졌거든. 중간에 팀원 두 명이 집에 가지만 않았더라도 우리가 1등할 수 있었다고…."

갑자기 말이 많아진 아빠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파스를 붙여주는 아들의 입에서 웃음이 배어 나옵니다.

"아빠 그럼 내년에는 저와 함께 우리 구역대표로 족구대회 나가실래요? 아빠가 나가신다면 저도 나갈게요."
"그래 그러자. 아빠도 좋아. 그런데 그 파스나 좀 제대로 붙여라. 엉뚱한 데 붙이지 말고. 하하하."

비록 파스를 붙이고 누워 있지만 아들과 족구대회 이야기를 주고받는 남편의 얼굴이 전에 없이 밝아 보입니다. 아무래도 승부에 미련이 남는지 벌써부터 다음 대회를 기다리는 남편. 어쩌면 내년에는 좀 더 미리미리 연습을 해서 멋진 실력으로 아들을 놀라게 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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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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