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71회

등록 2006.11.14 08:20수정 2006.11.14 08:20
0
원고료로 응원
그러더니 그녀의 입가에 다시 묘한 웃음이 떠오르다가 지우고는 곧 좌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좌어른께서는 이제 더이상 소녀들이 돌아가려는 것을 막지 않으시겠지요?"


이 정도 망신을 당했으면 돌아가도 되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좌등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설중행을 바라보고 있다가 상민민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물…물론이오."

좌등은 상민민에게 시선을 돌리면서도 설중행에게서 미련이 남은 듯 다시 힐끗 보았다. 그는 설중행이 펼친 무공에 대해 매우 낯익다는 느낌에 오히려 당황할 지경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인물이 젊었을 적 저것과 비슷한 무공을 펼친 적이 있었다. 저 청년과 마찬가지로 소매에 두 개의 소도를 감추고 있었다.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의 생각을 접었다. 비슷한 것은 많다. 꼭 저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충격이 밀려오며 잊어버렸던 가슴의 두근거림이 밀려왔지만 지금 그것을 내색할 필요는 없었다. 설중행이 운중보를 당장 떠나지 않는 한 알아볼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설소협과는 앞으로 만날 일이 있을 것 같군요."


상민민은 여전히 설중행에게 배시시 웃어주고는 좌중을 향해 몸을 살짝 굽혀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상교교를 부축한 채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상황이면 상교교가 뭐라 할만한데 그녀 역시 동생인 상민민의 말에 아무 대꾸 없이 걸어나갔다. 단 한 번 표독한 눈길을 능효봉에게 보냈을 뿐이었다.

허나 그녀가 시선을 던진 것이 잘못이었다. 능효봉은 그리 간단한 사내가 아니었다. 상교교의 귀속으로 능효봉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 네 년은 사내에게 죽도록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계집이지. 원한다면 언제든 패줄 수 있으니 찾아오너라. -

그것은 함부로 복수할 생각을 말라는 의미가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상교교는 모멸감과 함께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정말 저 작자를 실컷 두들겨 패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저 작자에게 실컷 두들겨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인연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녀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풍철한이 혀를 차며 소리쳤다.

"이 자식들…, 나보다 더 미친놈들 아니야? 상만천과 웬수지간이 되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딴에는 두 사람을 생각해 준답시고 한 말이었다. 설중행이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러라고 저 여자들을 충동질친 것 아니었소?"

"허… 이 자식 말하는 거 보게? 마치 내가 시켰다는 말투로구먼."

"그만두게. 설소협의 말이 틀리지 않았네."

함곡이 핀잔을 주듯 말하자 풍철한이 생사람 잡는다는 표정으로 함곡을 바라보았다.

"자네까지?"

"어쨌든 자네가 의도했던, 아니던 이미 일은 벌어졌네. 상만천이 이 소식을 들으면 저 두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네. 어쩌면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도 가만두지 않을지 모르지."

함곡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자 풍철한이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풋…, 아주 무섭군. 너무 무서워 갑자기 오한이 나는 것 같군. 상만천이 뭐 운중보주쯤 되는 것 같으이…."

"자네가 아직 상만천이란 인물을 몰라서 하는 말이네. 상만천의 피붙이에 대한 애정은 무조건적이네. 일가친척이 그리 많지 않은 가문이라 그런지 몰라도 자신의 피붙이, 더구나 각별한 애정을 가진 자신의 딸들이 모욕을 당했다면 절대 가만있을 위인이 아니네."

"빌어먹을…, 해볼 테면 하라지. 그건 그렇고 저 자식들 좀 살살 다루지…. 일을 너무 크게 벌려놨으니…."

정말로 능효봉과 설중행을 탓하는 말은 물론 아니었다. 또 자신이 어느 정도 의도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말이기도 했다.

"자네가 책임져야지. 누가 책임지겠나?"

"빌어먹을…, 이제는 아예 떠맡기는군. 이상하게 저 자식들 만나면서 내 인생이 꼬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풍철한은 툴툴거리며 능효봉과 설중행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함곡이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 풍철한 자신이 만든 일 아닌가?

"보이지 않는 칼이 무서운 법이오. 두 분은 앞으로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요. 상만천은 운중보 안이라 해서 눈치 보는 자가 아니오."

함곡 만큼 상만천에 대해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줄기 근심이 떠올라 있었다. 능효봉과 설중행은 고개를 끄떡였다. 함곡의 충고는 그의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참 조사하기도 껄끄럽군."

풍철한이 죽은 두 남녀에게 다가가다 걸음을 멈추고 모두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 각도만 달리한다면 정말 노골적인 모습 그대로가 모두 적나라하게 보일 터였다. 그래서인지 이미 선화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애써 시선을 돌려 밖을 내다보고 있는 듯했다.

함곡이 풍철한 곁으로 다가가다 걸음을 멈추고는 문득 좌등을 바라보았다.

"아마 저 여인이 시비를 관리한다던 가려란 여인이겠구려."

"어찌 아셨소?"

좌등이 고개를 끄떡였다.

"쇄금도가 운중보에 들어오자마자 무엇을 했는지 조사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소."

함곡의 말에 좌등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함곡은 좌등을 탓할 마음도 없었다. 쇄금도가 운중보에 들어와 사부의 시신을 발견하기 전까지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물었을 때 좌등 뿐 아니라 쇄금도도 애매한 표정을 지었었다. 함곡은 뭔가 말하기 껄끄럽거나 숨기고자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좌등에게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바도 있었다.

"무슨 말인가?"

풍철한이 고개를 돌리며 묻자 함곡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쇄금도에게 철담어른 거처에 성곤어른이 계신다는 말을 전한 사람이 바로 저 여인이었네. 그 말에 쇄금도는 자신의 거처로 가서 쉬었다고 했지."

"그럼…?"

"분명하네. 사부가 흉수에게 살해되는 그 시각에 쇄금도는 저 여인과 지금과 마찬가지 모습으로 운우지락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지. 아내가 있는 몸으로 이 운중보에 들어와 제일 먼저 한 짓이 바로 저것이었단 말이네."

그것 때문에 쇄금도는 여러 가지 말도 되지 않은 변명을 댔을 것이고, 좌등 역시 그러리라 눈치 챘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비록 운중보를 떠나 혼인까지 하고 돌아왔다지만 진가려는 오랫동안 쇄금도 윤석진의 여자였고, 앞으로도 그러했을 터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