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추억

라면을 먹으며 어린 시절, 가난한 추억을 더듬어봅니다

등록 2006.11.20 11:32수정 2006.11.21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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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파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집안이 참으로 조용합니다. 아내는 아르바이트하러 가고 아이들은 학원으로 공부하러 가고…. 덩그러니 혼자 남아 어쩔 줄 모릅니다.


햇살이 따사로운 베란다 문을 열면 겨울의 찬 기운이 방안에 가득 찹니다. 크게 심호흡도 해보고 한쪽에 자리 잡은 햄스터 식구들 먹이도 주고 물도 갈아주고 햄스터들이 쳇바퀴 돌리는 모습도 바라다봅니다.

근무하는 곳이 월요일에 쉬는 터라 월요일 아침이면 벌어지는 우리 집 풍경입니다. 모두 자리를 비운 뒤 혼자 남아 있는 것이 너무 이상합니다. 혼자 있으면 밥맛도 나지 않나 봅니다. 아내가 차려놓은 밥상에 시선을 두지 못합니다. 입맛도 그렇고 찬장에 있는 라면봉지가 두 눈에 잡힙니다. '그래 얼큰한 라면으로 한 끼 때우지 뭐'하는 생각에 식사를 라면으로 때우려고 라면 물을 올려놓습니다.

어린 시절 큰형님은 충주 비료공장에 다니셨습니다. 그 시절 충주비료공장에 다닌다고 하면 신랑 얼굴도 안보고 딸을 준다고 할 정도로 복지시설이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야근을 하고 오는 큰형님의 손에는 항상 라면 한 봉지와 밀크캐러멜이 들려 있었습니다. 캐러멜은 동생들 손에 들려주셨지만 라면만은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그 덕분에 라면은 어머니의 손으로 찬장에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a 아이들이 저를 위해 끓인 라면입니다. 꽤 매워보이죠?

아이들이 저를 위해 끓인 라면입니다. 꽤 매워보이죠? ⓒ 조용민

"엄마! 라면은 언제 먹는데?" 어머니는 "엄마 심부름 잘하면 이따 저녁에 끓여주마" 대답하셨습니다. 라면을 맛보고 싶은 생각에 어머니를 대신해 동네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커다란 물독에 가득 담아도 힘든 줄 몰랐습니다. 동네 아이들에게 '우리 저녁 때 라면 먹는다'고 자랑도 하고 말이죠.

저녁 무렵, 집안 가득 퍼지는 라면 냄새. 반은 국수였는데 그 사이로 꼬불거리는 라면 면발을 보면 입 안 가득 고이던 침. "아버지! 라면은 왜 이렇게 맛있데요?" 그러면 아버지는 웃으며 답하셨습니다. "그러면 매일 라면 먹을까?"

그날 저녁 일기장엔 라면 먹은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이제서야 제대로 밥을 먹이지 못했던 부모님의 아픔이 웃음 뒤에 숨어 있음을 압니다.


a 장모님이 담가주신 배추김치입니다.

장모님이 담가주신 배추김치입니다. ⓒ 조용민

아이들이 학원에서 돌아오는 소리에 전 추억에서 깨어납니다. "아버지!라면 끓이시려고요?" "그래, 오늘은 라면 끓여서 밥을 말아 먹자." 이에 아이들은 좋아합니다. 인스턴트 식품이기에 몸에 안 좋다며 아내는 아이들이 라면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연천에서 장모님이 보내주신 김치를 놓고 아이들과 라면잔치를 벌이렵니다. 뭐가 좋은지, 두 아들 녀석들은 신이 났습니다. 파도 넣어야 하고 달걀도 넣어야 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합니다.


"너희들 그렇게도 라면이 좋으니?" "예." 아이들은 신나게, 커다란 소리로 대답합니다. 먼 훗날, 아이들에게 라면은 어떻게 기억될까요? 나중에 아이들에게 물어보렵니다.

햇살이 좋은 날씨입니다. 라면 잔치 후 아이들과 드라이브나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를 뵙고 싶은 날입니다. '아버지! 라면 한 그릇 하실래요?'

덧붙이는 글 | 사이트 시골기차에도 보냈습니다.

덧붙이는 글 사이트 시골기차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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