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용의주도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닮았다

[동아시아의 군주들 ③] 센고쿠통일의 주역, 도요토미 히데요시 2

등록 2007.01.23 12:46수정 2007.01.23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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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용의주도함’이었다. 중국 입장에서 볼 때에 중국을 보호하는 방패막이인 오키나와-대만-조선을 하나씩 점령하다가 결국에는 만주를 점령하고 중원을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한 ‘근대 일본’이었다.

당시의 세계 정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었지만, 일본의 용의주도함 ‘덕분’에 동아시아 정세는 ‘일세동점’(日勢東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동아시아를 먼저 침략한 서양열강을 제치고 후발주자인 일본이 한때 역내(域內)의 최고 수탈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BRI@이 같은 ‘근대 일본’의 용의주도함은 그 직전 시기인 ‘근세 일본’의 한 인물의 퍼스낼리티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것이었다. 바로 근세 일본의 개창자 중 한 사람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년)에게서 그러한 용의주도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급 무사 출신인 도요토미는 생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복잡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15세 때부터 일본 각지를 전전할 만큼 불우한 초년(初年)을 거쳤다. 웬만한 사회였다면 그런 불우한 인물이 최고의 지도자에까지 오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또 웬만한 노력이었다면 그런 비천한 인물이 최고의 영웅에까지 오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센고쿠(戰國)의 혼란을 통일하고 관백(關白)의 지위에 올랐으며 나아가 대륙 침략까지 감행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의 개인 생애로 보아서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기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당시의 사회가 하극상으로 대표되는 혼란의 시대였다는 점과, 그의 노력이 용의주도함으로 표현되는 피나는 노력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럼, 그의 용의주도함이 전쟁술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제1부에서는 도요토미가 스피드를 앞세운 기습전, 수공작전, 병참차단 등의 ‘저비용, 고효율’ 전술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번 제2부에서는 관점을 다소 달리하여 그가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전쟁을 수행했는지를 논의하기로 한다.

참고로, 이번 기사에서는 한국의 태학사에서 2002년에 발행한 구태훈의 <일본역사탐구>와, 일본의 고사이도문고(廣済堂文庫)가 1990년에 발행한 구와하타 다다지카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발상력과 지모>(豊臣秀吉の發想力と智謀)에서 주요 사실관계를 참고하였음을 밝혀 둔다.

도요토미의 용의주도한 측면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중앙 권력을 장악하기 직전인 1581년의 돗토리성(鳥取城) 전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요토미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부하로서 서부 일본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수행된 전투였으며, 또한 포위 작전의 전형적인 사례로도 자주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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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토리성 성문. ⓒ 위키페디아백과사전 일본판

돗토리성에 대한 포위에 들어가기 훨씬 이전부터 도요토미는 양측의 군량미를 치밀하게 계산하였다. 그는 병참 차단의 방법으로 상대의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2가지 방식으로 상대방의 군량미를 끊고자 하였다.

첫째로, 상인들을 움직였다. 그는 수개월 전부터 상인들을 동원하여 돗토리성 지역의 미곡을 비싼 값에 매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돗토리성에서 사용할 식량 자체를 감소시킨 것이다.

둘째로, 농민들을 움직였다. 그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돗토리성 주변의 농민들에게 가혹행위를 하도록 하였다. 가혹행위에 시달린 농민들이 도피한 곳은 바로 돗토리성이었다. 가혹행위를 통해 성밖 농민들을 성안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돗토리성의 식량이 좀 더 많은 입(口)에 의해 소비되도록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은 2가지 방식을 통해 그는 적진의 식량 자체를 줄임과 동시에 적진의 식량 수요를 높이는 효과를 이중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수개월만에 현실로 드러났다.

포위 기간이 수개월이 지나자, 성안에서는 정말로 식량이 바닥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아사자가 속출하였음은 물론이고 성안의 병사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끔찍한 상황이 발생했다. 말은 물론 사람의 시체까지 먹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적군의 병사와 말이 줄어들게 되었다. 결코 도요토미가 적군의 병사와 말을 직접 죽인 게 아니었다. 결국 도요토미는 적장의 할복을 조건으로 돗토리성에 대한 포위를 풀어 주었다. 이 돗토리성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얼마나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 준 사례였다.

도요토미의 용의주도함은 비단 전투행위에서만 드러난 게 아니었다. 그러한 특징은 그가 지휘관이 되기 이전부터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청년 시절의 도요토미로 되돌아가 보기로 한다.

불우한 가정환경을 뛰쳐나와 일본 각지를 전전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당시의 이름은 기노시타 도기치로)는 18세 때부터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 처음에 그가 맡은 일은 오다 노부나가의 말을 사육하는 것이었다.

도요토미가 얼마나 열심히 말을 사육했던지, 말의 몸에서 윤기가 흐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말의 몸에서 윤기가 흐르는 데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가 주야로 열심히 말에게 사료를 준 것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도요토미가 틈만 나면 손으로 말의 몸을 문질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털에 윤기가 흘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주군의 눈에 들어 신발 담당 봉공인에 임명된다. 그는 그 일도 열심히 하였다. 추운 겨울 아침에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하였다가 주군이 문밖에 나오자 얼른 그 신발을 내놓았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많은 책에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언제라도 주군이 필요로 하는 때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루는 오다 노부나가가 새벽에 출동하려고 밖에 나왔는데, 어둠 속에서 미리 말고삐를 잡고 대기하는 자가 있었다. “누구냐?”라고 물으니 “도기치로(히데요시의 본명)입니다”라는 대답이 나왔다. 또 하루는 오다 노부나가가 매 사냥을 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거기 누구 없는가?”라고 외치자, 이번에도 “도기치로, 여기 있습니다”라는 대답이 들렸다.

이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치밀한 용의주도함을 바탕으로 하급 무사에서 관백에까지 올랐을 뿐만 아니라 주요 전쟁에서도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연출에 가까울 정도로 처절하고도 집요한 그의 일상 생활은 전투행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을 경탄케 하는 일본인들의 용의주도함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제3편의 마지막인 3부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해 살펴봅니다.

덧붙이는 글 제3편의 마지막인 3부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해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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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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