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꿈과 추억이 자란다

[서평] <자전거가 있는 풍경>에 서린 꿈과 추억

등록 2007.03.13 19:54수정 2007.03.13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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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도서출판 아침이슬
40대나 50대인 사람들은 누구나 자전거에 얽힌 동경 어린 추억이 한둘 있을 것이다. 자전거 뒤를 종일 졸졸 쫓아다녔어도 끝내 한번 얻어 타지 못하고 '인생의 쓴맛'만 너무 어릴 때 봐 버린 기억에서부터 처음 자전거를 배우면서 겪었던 고생들 말이다.

키가 작아 가슴께까지 오는 자전거 안장에 올라가기 위해서 자전거를 담장이나 화단대 옆에 받쳐두고 페달에 올려놓은 발을 밟는 동시에 다른 발로는 담장을 밀치던 일. 페달에 오른발을 올려놓고 왼발로 땅을 밀치며 자전거를 굴러가게 한 다음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그때 왼발로 페달 축을 딛고 잽싸게 오른발을 들어올려 자전거에 올라타던 일 등.


나도 '자전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이것저것 고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자전거에 얽힌 기억 중 단연 으뜸인 기억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냅다 달리다가 대여섯 길이나 되는 시냇물 다리 위에서 소 달구지와 정면충돌을 했던 적이 있다. 죽을 뻔했던 일이다.

뒤늦게 발견한 소 달구지가 다리를 꽉 채우고 오고 있는데, 브레이크는 말을 듣지 않고 피할 공간은 없는데, 자전거는 망할 놈의 관성의 법칙 때문에 쏜살같이 내 달렸다. 비명에 앞서 '이 나이에 이제 죽었구나, 내가 중3인데 너무 아쉽다…'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꽝! 하고 자전거 앞바퀴가 달구지 몸체와 발통 사이에 박혀버렸고, 내 엉덩이는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다행히도 내 엉덩이는 다리 아래로 낙하지점을 잡지 않고 자전거 안장으로 되돌아왔다. 핸들을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아서인데, 자전거 핸들의 호크가 와장창 부러진 것을 보면 다리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내가 지구별에 태어나서 뭔가 해야 할 사명이 있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그날로부터 34년이 지났건만 여태 그게 뭔지 모른 채 살고 있다.

@BRI@<자전거가 있는 풍경>에 나오는 시인 김진경씨가 꼭 그랬었나 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내리막길을 만났고, 논산훈련병들의 대오 속으로 자전거가 박혀버렸던 것이다. 두 사람의 신병이 나뒹굴었는데, 정작 꼬마 김진경이는 자전거와 함께 너무 멀쩡해서 귀싸대기를 코피가 나게 얻어맞았다는 것이다.

소설가, 시인, 의사, 교사, 영화인 등 열여덟 사람이 독자들을 그리움이 가득 담긴 옛 풍경 속으로 데리고 가 들려주는 이야기책이 바로 <자전거가 있는 풍경>이다.


소설가 방현석씨는 베트남으로 안내한다. 백미러가 없는 베트남의 자전거를 보면서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는 베트남 정부의 진취적인 정책구호와 연결 짓는다. 베트남 전통 옷인 흰 아오자이를 휘날리는 여학생들의 자전거 물결을 소개하면서도 뒤돌아보지 않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바라보며 바로 가기만 하면 뒤따르는 자전거나 자동차가 도리어 사고를 내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뒤에 가는 사람들은 앞선 사람의 속도와 방향을 신뢰하고서 자신의 속도를 조절하고 추월방향을 잡는다는 것이다. 강한 힘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신뢰의 강한 힘을 믿는다'는 베트남 시인 '반레'와의 일화도 소개한다.


자전거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꿈으로도 등장하는 곳이 <자전거가 있는 풍경>이다. 소설가 공선옥씨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두 발 달린 기계와 친하지 못하지만 은빛 자전거의 유혹에 넘어가고 싶은 심경을 잘 담고 있다.

자동차가 없는 공씨는 걷거나 버스를 타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들지 않고 가볍게 다닌다. 그러나 가끔 시장 보러 갈 때는 자전거가 그립다는 것이다.

50이 넘어설 때쯤엔 검은 생머리가 아니라 흰 파마머리 날리며, 하얀 드레스가 아니라 청바지를 입고서라도 자전거를 타고 싶은 꿈을 말한다.

자전거의 실용성과 자연생태적 의미만을 새기면서 과도하게 자전거에 매달리다 낭패 본 이야기도 재미있다. 60만원짜리 산악자전거를 샀다가 친구에게 줘 버렸는데, 다시 100만원짜리 산악자전거를 샀지만 이것 역시 몇 번 타보지 않고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가 처제에게 줘 버린 이야기가 나온다.

속도만 숭배하는 자동차 문명에 대한 성찰을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지 않은 것이 아쉽다. 자전거는 단순한 추억거리나 한가한 사람들의 여가선용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무기라는 생각을 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자전거가 있는 풍경> 아침이슬. 9000원. 2007년 1월 발행

덧붙이는 글 <자전거가 있는 풍경> 아침이슬. 9000원. 2007년 1월 발행

자전거가 있는 풍경

구효서.박경철 외 지음,
아침이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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