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록색 들녘 종달새 노래와 '삐비낙지'

남도 보리밭길의 추억

등록 2007.05.07 11:48수정 2007.05.07 13:56
0
원고료로 응원
a 남도 들녘의 보리밭. 그 하늘엔 종달이 노래가 한창이다.

남도 들녘의 보리밭. 그 하늘엔 종달이 노래가 한창이다. ⓒ 최성민

신록의 아름다움이 도배하듯이 세상을 물들이는 요즘, '파아란~' 색깔의 원조격으로 순수 녹색의 청초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신록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 보리밭이다.

이맘때 노랑나비를 쫓아 들판을 뛰어다니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은 어디 풀내음 상큼한 밭둑 풀섶에 한나절쯤 푹 파묻혀 봤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할 것이다. 보리밭 두렁에서 종다리 노래를 자장가 삼아 거나한 봄낮잠을 즐겨보는 일은 꿈으로나 가능한 것일까?


부안의 어느 대규모 기업형 보리밭이 요즘 언론의 홍보를 집중적으로 누리고 있지만, 남도의 들녘, 황토색 듬성듬성한 여느 들판에서도 우리는 꿈에 그리던 봄날의 서정을 만나볼 수 있다.

그곳엔 지금 순수한 연록색이 얼마나 청초한가를 말해주는 보리밭이 한창 일렁이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는 유채꽃보다 해맑은 노랑 배추꽃이 만발해서 보리밭과 서로 상대방 색깔을 부추겨주고 있다.

지금 남도의 보리밭 하늘은 생명의 탄생을 흥분에 젖어 외쳐대는 종다리의 노래로 가득하다. 종다리 노래는 새소리 가운데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종다리는 하늘에 떠서 "쫑알 쫑알~ " 한 번 울어대기 시작하면 5분이건 10분이건 그치지 않는다.

보리밭에 새끼를 까 놓고 그러는 것이다. 20~50여m 높이의 하늘에서 가만히 선 채 날개만 팔랑거리며 "쫑알~ 쫑알~ " 하염없이 울어대던 종다리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별 일 없겠다 싶으면 보리밭 고랑으로 곤두박질한다.

그 광경을 밭두렁 밑에서 숨죽이며 지켜보다가 종다리가 들어간 대목으로 슬금슬금 기어가서 "쮸~, 쮸~ " 유혹하면, 종다리 새끼들은 이내 밥 달라고 "끼길~ 끼길~ " 아우성을 친다. 학교 갔다 오는 길의 그 '종다리집 찾기' 추억은 고향을 보리밭 사잇길에 묻어두고 온 사람들의 가슴을 지금쯤 퍽 아리게 할 것이다.

a 삐비

삐비 ⓒ 최성민

보리밭길은 어디나 '삐비밭 길'이다. 삐비는 표준말로는 '삘기'라 한다. 그러나 삘기 보다는 삐비라는 '토속어'가 나에게 표준말이자 정겨운 이름이다. 삐비는 띠풀의 어린 꽃주머니이다. 고운 봄날 이것으로 쑥싹 뽑아 입에 넣으면 단물이 총총 우러져 나온다. 별다른 군것질거리가 없던 예전 시골아이들의 훌륭한 봄날 주전부리감이었다.


삐비는 그냥 바로 먹기도 하지만 그 부드럽고 흰 자태가 너무 고와서 놀이개감으로 갖고 놀다가 먹기도 한다. 삐비로 만드는 장난감 한 가지가 '삐비 낙지'이다. 삐비 발을 둥그럽게 오그려서 낙지 머리를 만들고 길게 발을 붙여 놓으면 삐비낙지가 된다. 삐비를 그냥 먹는 것 보다는 삐비낙지를 만들어 먹으면 구수한 맛이 더했을까?

a 삐비 낙지

삐비 낙지 ⓒ 최성민

삐비는 또한 입에 넣고 바로 삼키지 않고 한참을 오물조물 씹어대면 '삐비껌'이 된다. 단물이 다 우러나 빠지고 쫄깃쫄깃한 감촉만 남은 것이 껌같은 질감을 준다. 삐비는 5월 중순을 넘기면 꽃으로 피어나 온 산야와 할머니 무덤을 온통 새하얀 색깔로 덮어 씌운다.


사람들이 축제가 관광지다 하여 명소로만 몰려가는 요즈음, 사람과 문명을 피해 원초적 자연의 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주의 여행이 아닐까? 보리밭 녹음에 묻혀 종달이가 소프라노를 한껏 늘여빼는 하늘을 쳐다보고, 보리밭둑을 거닐며 삐비를 뽑아 삐비낙지를 만들어 먹어보는 일은 요즘 얼마 남지 않은 남도의 보리밭길이 아니면 가져볼 수 없는 자연체험이자 한국의 토속이라고 할 수 있겠다.

a 삐비꽃

삐비꽃 ⓒ 최성민

#보리밭 #종달새 #삐비 #삐비 낙지 #삐비꽃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겨레신문 창간발의인, 문화부 기자, 여론매체부장, 논설위원 역임. 곡성 산절로야생다원 대표.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소장. 철학박사(서울대 교육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