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이순신 암살작전 2회

등록 2007.06.07 15:15수정 2007.06.0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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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게나."

나는 맹자가 펼쳐진 서탁(書卓) 너머에 좌정한 50대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극에서 대감들이 즐겨 쓰는 산(山)자 형태의 관을 쓰고 당당한 풍채에 의젓하게 수염을 길렀으나 전체적으로는 이렇다 할 특징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도포와 대갓을 차리고 나가면 체격이 크다는 것 외에 다른 사대부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을 터였다. 체격이 큰 것은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을 사유가 되지 못했다. 이곳이 성지가 분명하지만 앞에 있는 사내는 내가 그토록 숭앙했던 영웅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자네는 얼굴로 글을 쓰나?"
나는 움찔 놀랐다.
"마찬가지야, 얼굴로 전쟁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과 함께 싸늘한 검광(劍光) 같은 것이 번득였다. 차갑고 살벌한 그것의 출처는 눈이었다. 그는 눈빛으로도 단숨에 상대를 벨 것 같았다. 그제야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갑자기 변했다.

현충사에 봉안된 영정의 모습에서 통영의 제승당에 모신 영정으로 변한 다음, 광화문에 세워진 동상으로도 변했다.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하던 그가 <불멸의 이순신>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의 모습으로까지 변하는 것을 보고는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 했다.

"나를 이런 모습으로 그린 것은 후세의 사람들일세."
"……"
"특히 자네는 작가라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겉으로만 보고 재단해서야 되겠는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어 엎드려 사죄했다. 그의 이름은 이순신(李舜臣), 462년 전 바로 남산 건천동(乾川洞)의 이곳에서 태어나 7년에 걸친 임진(壬辰)과 정유(丁酉)의 대전쟁에서 무수한 죽음을 양산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이었다. 세계역사에 찬란한 획을 그은 영웅들이 무더기로 덤벼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을 위대한 영웅을 감히 의심한 죄는 백번 죽어 마땅했다.


"앞으로는 그냥 장군이라고 불러라,"
그것이 가장 편했다. 서로 마주보는 상태에서 시호인 충무공(忠武公)으로 호칭하기는 곤란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를 왜 여기에 데려다 놓으셨습니까?"
"네가 나의 교도라고 하였는데, 교주(敎主)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하도 기특하여 술이라도 한 잔 사주려고 데리고 왔느니라."


장군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최근에 출판된 나의 저술에 스스로를 '이순신교의 교도'로 칭하였는데, 그렇게 표현하면 한 권이라도 더 팔리지 않을까하는 얄팍한 심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을 당사자에게 정면으로 찔렸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여기에 오게 된 이유를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곧 술상이 들어왔다. 술은 요즘 팔리는 소주였으며 술상은 생각보다 조촐했다.

장군에게 잔을 드리려는데 착암기를 잡기라도 한 것처럼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손이 남의 것 인양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술이 잔을 넘치는 결례를 범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세계역사의 최고봉에 우뚝 선 성웅에게 잔을 드리는데 이렇게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심장마비를 일으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내가 젊었을 때 충무김밥 집에서 알바를 하였다고 하였느냐?"

이번에는 아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장군이 충무공이 된 것은 젊은 시절에 충무김밥에서 알바를 했기 때문이라는 따위의 장난삼아 했던 농담을 한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광화문에 있는 동상이 칼을 오른 손에 잡고 있는 것은 모델을 하다가 팔이 아파 잠시 바꿔 쥐었을 것이라며 주장한 것 등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저 쥐구멍을 찾고 싶을 따름인데 장군은 빙그레 웃었다. 잠시 후 나도 따라 웃었다.

장군의 농담에 긴장이 적지 않게 풀렸다. 첫 잔을 넘긴 장군이 굳이 잔을 따를 필요 없이 각자 알아서 마시자고 했다. 투명한 윤활유처럼 부드럽게 넘어간 술의 입자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이러다가 취해서 실수라도 저지르면 큰일이라고 걱정했다. 그런데 분위기를 즐기기에 딱 알맞은 정도로 취하고는 그 이상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 오늘은 온통 이해하지 못할 것투성이였지만 가장 반가운 현상이었다.

"명량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나는 대뜸 명량을 말했다. 겨우 13척의 패잔함대를 이끌고 수십 배에 달하는 적을 산산이 부숴버린 기적 같은 대승리에 감격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명량의 대승은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엎을 정도로 순도가 높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그때가 장군으로서는 최악의 상태였다는 점이다.

장군과 늘 비교되는 트라팔가의 영웅 넬슨 제독과 발틱함대를 격멸시킨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사령장관(東鄕平八郞)은 너무나 행복한 환경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함대가 도합 67척인 것에 비해 넬슨은 56척으로 그리 열세하지 않았으며, 도고의 경우는 오히려 적보다 우세했다. 두 사람이 충분히 우승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팀을 이끌었던 데다 조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에 비해, 장군은 완벽하게 정 반대의 처지였다. 겨우 13척에 지나지 않은 초라한 함대를 이끌게 된 것은 어이없게도 그토록 충성했던 조국 때문이었다.

장군이 아니었으면 전쟁은 임진년에 끝났을 것이 분명했다. 못 한 개, 쌀 한 톨 보태주지 않은 조국을 먹여 살린 사람이 누구였던가? 맨주먹으로 한산도에 세계 최강의 해군전력을 양성하여 조국을 지켜낸 장군에게 지급된 것은 최악의 배반이었다.

장군이 잡혀 들어가 갖은 고초를 당하는 동안 선조(宣祖)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원균은 세계 최강의 삼도수군(三道水軍)을 깨끗이 말아먹어버렸다. 선조가 총애한 '왕의 남자'가 충성한 임금은 일본의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그 이전에 이순신을 잡아 죽이려 들었던 선조가 조선의 임금이 맞는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도움과 지원은커녕, 최악의 배반과 고문이 가해졌으며 연로한 모친까지 돌아가시는 슬픔까지 겹쳐졌다. 갖은 악조건이 첩첩이 가로막은 상태에서도 위대한 승리를 거둔 장군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장군과 강력한 함대와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은 도고 따위를 함께 놓고 비교한다는 자체가 최악의 불경일 것이다. 넬슨도 스스로 전함과 무기를 만들고 무기를 생산하여 싸우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니 장군과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가지 질문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말하게나."
"준사(俊沙)에 대한 것입니다."

준사는 명량해전에서 장군의 기함(旗艦)에 승선하여 전투를 치렀던 자인데, 특이하게도 출신성분이 안골포(安骨浦 - 경남 진해시 안골동)에서 투항한 일본군이다. 준사는 전투 중 적장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가 떠내려가는 것을 발견하여 참수하게 만들었다.

장군의 전함에 구루지마의 목이 내걸리자 적군이 급격히 외축되어 전투의 분수령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셈인데 나는 늘 준사의 존재가 거북했다. 준사처럼 항복한 일본군인 항왜(降倭)들은 적지 않았으며 대부분이 예전의 조국이었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감안하면 준사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준사가 있던 곳에 주목했다. 비록 항복한 다음이라고 해도 일본군으로서 장군의 전함에 올라가 본 유일한 케이스라고 할 것이다. 그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만큼 다급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본질적으로 왜놈인 준사는 이순신의 전함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장군과 긴밀하게 통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준사의 행동도 석연치 않았다. 그때는 제 아무리 천하의 이순신 장군이라고 해도 한 줌도 안 되는 패잔함대를 가지고서 절대 이기지 못했을 것으로고 생각했을 확률이 컸다. 13척 vs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적함'의 승부는 상식선에서 논해질 일이다. 실제로 이순신이 백의종군에서 풀렸을 대 수군 장병들의 태반이 탈주했다.

또 겨우 13척과 장병을 수습한 이후 명량해전 이전까지 적과 몇 번의 접촉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장병들이 공포에 질려 전혀 싸우지 못했다. 게다가 경상우수사 배설(裵楔)까지 전투를 피해 이탈하는 형편이고 보면 준사는 당연히 탈출해야만 했다.

전력이 너무나 기우는 데다 생포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차마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난자하여 죽이거나 귀와 코를 베는 것이 보통이었던 그 시대에 적에게 붙은 배반자의 최후는 말로는 어떻게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을 것이다.

그리고 준사는 포로로 잡힌 게 아니라 제 스스로 투항한 자가 아닌가, 그것은 마음만 먹는다면 또 한 번의 탈출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준사는 끝까지 장군과 함께 싸웠다. 도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게다가 준사는 시체가 되어 떠내려가는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한 눈에 알아보았으며, 갈고리로 걸어 올리자 "구루지마가 틀림없다"며 기뻐 날뛰었다고 했다. 그것 역시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심이 갔다.

*구루지마 미치후사 : 난중일기에 마다시(馬多時)로 기록된다. 유명한 해적 가문인 무라카미(村上)의 일원인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지배자로 떠오르게 되자 그쪽으로 가담하여 봉록을 받게 된다.

*13척 : 명량해전 당시 적의 규모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논란이 많다. 이순신이 직접 기록한 난중일기와 장계에는 130여척 가운데 31척을 격파했다고 되어 있으며 그것을 신빙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불리하게 돌아가던 전세를 일시에 뒤집으려던 히데요시가 겨우 130여척만 동원할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31척이 격파 당했다고 해서 물러간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최소한 400척에 이르는 대함대와 교전하여 거의 전부를 격파한 것으로 추정한다. 기록에 나타난 31척의 격파는 이순신 혼자서 올린 전과로 보는 것이다. 상세한 기록을 제시하고 싶지만 이미 저술한 책에 적시하였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다만 명량해전 당일 이순신에게 최초로 보고한 별망군(別望軍)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敵船)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의 보고내용은 좋은 증거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130여 척을 가지고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보고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경상우수사 배설 : 원균이 조선 수군을 말아먹을 때 10여척을 이끌고 탈출한 사람이다. 배설이 명량해전 직전에 몸이 아파 치료를 해야 한다며 말하자 이순신은 별 트집을 잡지 않고 육지로 내리게 해 준다. 배설은 즉시 도망치는데, 아무렴 천하의 이순신이 배설의 속셈쯤을 짐작하지 못하였겠는가, 배설은 주장인 원균(元均)을 버리고 탈영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그런 자가 함대에 있어봐야 도움이 될 리 만무한데다, 실제로 체포당하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극도로 저하된 사기가 치명적으로 훼손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고 본다. 사지(?)에서 탈출하여 고향에 숨었던 배설은 나중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지만 그가 탈출하면서 이끌었던 함대가 이순신에게 인계되어 명량의 신화를 이루게 되는 바, 그의 공도 충분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준사 : <난중일기>에 나오는 준사의 모습을 보자, "항복해온 왜놈 준사(俊沙)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이다. 내 배 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馬多時)다'라고 하였다. 나는 물 긷는 군사 김돌손(金乭孫)으로 하여금 갈고리를 던져 이물로 끌어 올렸다. 그러니 준사는 기뻐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고 하였다.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렸다."

준사의 등장과 함께 흥미로운 것은 구루지마를 낚아 올린 김돌손이다. 구루지마가 건장한 체격에다 일본 특유의 화려한 갑주(甲冑)차림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최소한 쌀 한 가마니 무게는 되었을 텐데, 그것을 혼자 낚아 올리는 것을 보면 대단한 장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처음에 힘으로 던져 적함을 걸어 잡는 사조구(四爪鉤) 같은 무기의 효용성을 의심했었다. 그러나 난중일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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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에서 왼쪽은 장우성 화백이 1973년에 그려 현재 표준으로 통하는 현충사의 영정이며, 오른쪽은 정형모 화백이 1978년에 완성하여 제승당에 모신 영정이다. 얼굴의 형태가 상당히 비슷한데, ‘큰 키에 제비턱과 붉디붉은 용의 수염에 범의 눈썹’이라는 주변의 고증에 의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고증이라기보다는 칭송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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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사

오른쪽 그림은 1932년에 현충사를 중건(重建)했을 때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화백이 그려 봉안한 것인데, 고증이 맞지 않는다 하여 장우성 화백의 것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직접 얼굴을 본 사람의 상세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고증을 따질 수 있겠는가. 그림의 인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오히려 이상범 화백의 것이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기록을 소개할까 한다. 당시 이순신의 측근 가운데 삼가(三嘉)의 현감을 지낸 고상안(高尙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고상안이 이순신을 표현하기를, "세상에 넉넉히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용모이며 입술이 위로 들려 있다"라고 하였는데 가장 정확한 고증이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런 충무공의 영정을 바라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고상안이 원균을 "거칠고 사나우며 무모한데다 인심마저 잃고 있다"며 평하였다는데, 그것 역시 그냥 흘릴 것이 아니다.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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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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