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떠나기 위하여 항구에 닿는다

[늘근백수의 객적은 길 떠나보기 14]크루즈의 다섯번째 밤

등록 2007.06.22 12:15수정 2007.06.2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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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 돌아오니 오후 3시였다. 14층 뷔페식당에 올라가 때 늦은 점심을 먹었다. 배에 온 이래 저녁은 항상 지정된 좌석에 웨이터가 서브하는 6층 식당을 이용하지만 아침과 점심은 주로 이 식당을 사용하는 편이다. 언제나 이용이 가능하고 음식을 골라서 먹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식사를 하면서 창밖의 경치를 다른 어느 곳에서 보다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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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배의 최상층, 선두(船頭)에 위치하여 배의 진행 방향에 따른 풍경의 변화를 감상하기에도 좋고 거기에다 사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어지간한 자리에 앉아도 갑갑하지 않게 바깥 경치를 내다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배안에 여러 식당이 있지만 위치 하나만은 이만한데가 없었다. 더욱이 오늘은 선두 정면 창가에 자리가 나, 떠나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음식을 대하니, 음식보다 풍경이 먼저 입으로 들어와 내 자신의 배(腹)가 만선(滿船)이 된 느낌이었다.

배는 천천히 쥬노를 떠나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멀어져 가는 시가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우산을 쓰지 않고 걷는 게 보였다. 산들은 구름으로 배를 가렸고 바다에는 배가 남기는 물자죽만 배를 쫓아오며 선명한데, 육지를 벗어난 비는 내릴 곳을 찾지 못해 바다 위를 배회하다가 종내는 바닷속으로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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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떠나는 배에 앉아 멀어지는 항구를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고 미묘하다. 약간의 아쉬움과 약간의 안타까움, 약간의 미련, 그리고 약간의 안도감. 떠나는 배는 이제 와서는 뱃고동 따위는 울리지 않는다. 스피커에서 간단한 안내방송으로 떠남을 고지하고 시계바늘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항로 위를 미끌어져 갈 뿐이다.

배가 떠날 때는 같은 값이면 어두워지는 석양 무렵이면 좋다. 거기에다 오늘처럼 비라도 내리면 더욱 애잔하고 감미로울 것이다. 떠나게 되는 아쉬움과 떠나게 되는 홀가분함이 교묘하게 뒤섞일 때, 그때 비 내리는, 촉촉히 젖은 항구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 일은 사람들이 크루즈를 찾는 또 다른 요인이 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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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식사 후에는 느긋히 선내를 배회하였다. 어찌보면 크루즈 여행이란 절반의 닫힌 여행인 셈이다. 배는 자폐아처럼 물위에 홀로 떠있고 사람들은 내장을 내 놓은 해삼처럼 서로의 약한 부분을 핥으며 자신을 위안하고 있는 것이다.

8층 계단옆의 카드룸에는 오늘도 대여섯명의 중국인이 둘러앉아 마작을 하고 있다. 그들은 승선 첫날부터 언제나 같은 자리에 같은 사람들과 마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옆 테이블이 사람과 카드 내용이 번번히 바뀌는데 반해 그들은 시종여일 같은 사람, 같은 장소, 같은 게임을 줄곧 한시도 쉼없이 하고 있었다. 카드룸의 위치가 우리가 식사를 하러 다니는 길목이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게 되는데 그들은 마치 마작을 하기위해 이 배를 탄 것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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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14층 뷔페식당 뒷편에는 두 개의 풀장이 있는데, 하나는 노천이고 하나는 유리로 덮힌 실내다. 그곳 풀장은 젊은 여성승객들이 애용하는 장소 중의 하나인데 그들은 남의 시선를 부담스러워 하지않고 얇은 비키니 두 쪽으로 몸의 일부만을 가린 채 물장난 하기에 여념이 없다. 비가 오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노천에서 비를 맞으며 수영에 몰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인 마져리 글레시어 앞에 배가 멈췄을 때에도 글레시어에는 눈길 한번 주지않고 자기 재미에만 빠져 있어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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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7층 갑판에는 배의 난간 안쪽으로 폭 5, 6m의, 배를 한바퀴 돌 수 있는 통로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바깥 바람을 씌며 쉬거나 난간에 기대어 흘러가는 배의 물살을 보거나 또는 그 통로를 따라서 뛰거나 걷기도 한다. 친절하게도 곳곳에 팻말을 붙혀 2바퀴 반을 돌면 1마일(1.6km)이라고 알려놓았는데 이른 아침이면 그 통로를 따라 수 많은 사람들이 배돌이(?)를 하기도 한다. 그들은 달리기 하여 이 배를 탄 것처럼 달리는 배위에서 또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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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크루즈란 바다 위에 떠다니는, 벌통이 담긴 크다란 어항이다. 승객들은 개개의 닫혀진 벌집 안에서 나름대로의 재미에 열중한다. 그들은 TV를 볼 수도 있고 발코니에 앉아 눈 덮힌 산들이 뒷걸음 치는 모습이며 고래가 넘나드는 바다를 바라보며 한 잔의 술을 마실 수도 있고 그외 사람들이 방에서 하는 모든 짓들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열린 공간으로 나와 그들의 심심함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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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그러나 그 공간은 완전하게 열린 공간이 아니라 방안에 놓인 어항처럼 중인환시리의 열린 공간이다. 어항 안을 노니는 물고기가 쳐다보는 인간의 눈을 의식하지 않듯이 열린 공간에 나와 노는 승객들은 어항 가를 둘러싼 타 승객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야 그때부터 크루즈 생활이 즐거워진다. 안과 밖, 닫힘과 열림, 자폐와 사교, 나와 남이 묘하게 얽힌 곳이 크루즈 생활이다.


저녁 식사에는 메인 디시로 킹크랩이 나왔다. 4인석인 우리 테이블에는 오늘도 다른 2명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아마 그들은 다른 식당으로 바꾼 모양이다. 킹크랩은 좋았다. 작은 아이 팔뚝만한 그놈은 그 크기에도 불구하고 양에 있어서 미진하여 내가 입맛을 다시자 친절한 '희랍인 조르바'는 두 마리를 더 주문하여 갔다 주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든가, 식중 금강산은 더더욱 좋았다. 와인에 게다리를 뜯어며 바다에 비친 산을 쳐다보는 것, 이것이 즐거움이겠지. 그것이 즐거움이라면 그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술과 게다리와 바다에서 오는 것인가? 그것을 보고 느끼는 내 머리에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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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식사를 마치고 극장에 들렀다. 오늘도 전일과 비슷한 코미디 쇼였다. 동행을 남겨두고 슬그머니 빠져나와 배의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각각의 방들은 사람들로 그득했고 개개의 사람들은 개개의 즐거움을 추구하기에 아주 열심들 이었다. 어떤 이들은 카지노의 슬로트머신 앞에서 그들의 즐거움을 연신 잡아당기고, 어떤 이는 음악이 귓청을 때리는 홀에서 파트너와 춤을 추면서 그들의 즐거움을 안으려 애쓰고, 어떤 이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바에서 (특정 바에만 흡연이 가능하다) 술잔을 부딪히며 즐거움을 목구멍으로 털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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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그들은 즐거운 모양을 지으며 즐거워 보인다. 그들은 즐거운가. 즐거워서 행복한가. 밤바람이 제법 부는 7층 갑판으로 나와서 크게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나는 물었다. 나는 지금 즐거운가, 즐거워서 행복한가. 배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다음 정박지인 캐치칸(Katchikan)으로 내닫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 평범한 '늘근백수'가 미국 등지를 떠돌며 보고 느낀 것을 기술해가는 여행기입니다. 여행은 4월 25일 시작되었고, 7월 말 쯤 끝낼 예정입니다. 지금은 알래스카-밴쿠버 간의 크루즈 여행기를 올리는 중이고 이어서 캐나다 록키 패키지 관광을 게재하려 합니다. 

이런 글을 씀이 무선 의미를 갖겠는가, 끝없는 회의가 들어서 글을 중단할까 하다가도 그래도 글을 기다린다는 몇몇 분을 생각하며 글을 쓸 힘을 냅니다. 어차피 생이 긴 여행인데 왜 또 이런 여행길에 올라 이 고생을 자초하는지...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 평범한 '늘근백수'가 미국 등지를 떠돌며 보고 느낀 것을 기술해가는 여행기입니다. 여행은 4월 25일 시작되었고, 7월 말 쯤 끝낼 예정입니다. 지금은 알래스카-밴쿠버 간의 크루즈 여행기를 올리는 중이고 이어서 캐나다 록키 패키지 관광을 게재하려 합니다. 

이런 글을 씀이 무선 의미를 갖겠는가, 끝없는 회의가 들어서 글을 중단할까 하다가도 그래도 글을 기다린다는 몇몇 분을 생각하며 글을 쓸 힘을 냅니다. 어차피 생이 긴 여행인데 왜 또 이런 여행길에 올라 이 고생을 자초하는지...
#늘근백수 #크루즈 #배 #항구 #알래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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