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함께 남은 진도의 나루터

2000년 역사를 지닌 벽파진

등록 2007.07.08 13:01수정 2007.07.0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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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를 지나 도착한 곳은 벽파진이었다. 평범한 항구처럼 보이는 벽파진은, 도착하자마자 푸른 바다가 마음을 끌었다. 이번 진도 여행에서 사실 용장산성에서 멀찌감치 바다를 바라본 것 외에는 바다와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벽파진에 옴으로서 바다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좀 지나 날은 저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벽파진에서 머물 시간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을 듯하였다. 파란 바다를 보고 오랜만에 바다냄새를 맡으니 정겨움에 취함이, 홍주에 취함보다 더하였다.


a 이충무공전첩비에서 바라본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이 감부도이다. 이러한 지세는 고흥 발포만호성도 비슷하다. 둘 다 이순신과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충무공전첩비에서 바라본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이 감부도이다. 이러한 지세는 고흥 발포만호성도 비슷하다. 둘 다 이순신과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 송영대

이곳의 지형은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하다. 바다로 펼쳐졌으면서 가운데에 자그마한 섬이 있다. 바로 감부도인데, 이 모습이 고흥 발포만호성에서 바라본 지세와 느낌이 비슷하다. 둘 다 이순신장군과 인연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데,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지세를 깊이 봐두었다가 그에 맞는 효율적인 시설을 설치하였다는 점에서 높게 살만 하다.

벽파진에서 마주한 것은 바다와 함께 커다란 바위였다. 땅인지 바위인지 구분이 안 갔는데, 그 위에는 이충무공 전첩지가 있다. 자리를 옮겨 이충무공 전첩비 쪽에서 바다를 보러갔는데, 그곳에선 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전첩비 아래쪽에 전망대를 하나 설치해 놓았는데, 전망대가 그다지 튼튼하지 않고, 계단 부분도 부서져 있었다. 후에 진도군에서도 이에 대해서 보수공사를 하거나 아님 개축하여 멋있는 전망대 하나를 만드는 것도 어떨까 한다.

a 벽파진에 있는 충무공벽파진전첩비. 바위를 쪼개어 비를 만들었다. 거북이가 비문을 받치고 있으며, 1956년에 진도군민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벽파진에 있는 충무공벽파진전첩비. 바위를 쪼개어 비를 만들었다. 거북이가 비문을 받치고 있으며, 1956년에 진도군민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 송영대

이충무공 전첩비는 1956년 11월 29일 진도군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이 비는 담담한 모습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하니 서 있었다. 이 비석은 본래 있었던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고 한다.

비좌는 거북이로서 사지를 펼치고 있는데, 거북선의 모습이라기엔 목주름이 있고, 일반적인 비좌의 모습인 거북받침돌로 보기엔 사지(四肢)를 뻗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일반적인 거북받침돌에서는 사지를 생략함에 비해, 여기에서는 사지를 드러내고 주위에는 해자나 주구처럼 도랑을 팠는데, 비가 내려서인지 약간의 물이 고여 있었다.

비신은 멋들어지게 글을 써놓았는데,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한 노산 이은상 선생이 글을 쓰고, 진도 출신의 명서예가인 소전 손재형 선생이 글을 쓴 것이라 한다. 한 눈에 봐도 글씨가 범상치 않으며 제 1면에는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忠武公 碧波津 戰捷碑)라 새겨 놓았고, 그 아래에 글씨가 써져있다. 글씨는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쓴 것으로서 50년대의 글이라서 문어체적인 면이 강해 약간 딱딱하였다. '및여', '걷우어' 등으로 현재의 맞춤범과는 다른 글귀도 있었다. 옆의 안내판에는 이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울돌목을 울도목이라고 써 놓았는데, 이는 같은 말이며 울뚤목이라고도 한다.


비신 위의 가첨석은 두 마리 용이 서로를 꼬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무엇인가가 나와 있다. 용의 코와 눈은 위를 바라보듯이 살짝 올라갔으며, 으르렁 거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a 벽파진의 큰 바위에 줄줄이 있는 홈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장대를 꼽아놓았거나, 채석한 흔적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벽파진의 큰 바위에 줄줄이 있는 홈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장대를 꼽아놓았거나, 채석한 흔적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 송영대

전첩비에서 내려와 바위를 살펴보다 보니 약간 이상한 흔적이 보였다. 바위 군데군데에 길게 홈이 파져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석공들이 바위를 쓰기 위해 절개한 흔적 같기도 하고, 장대를 꽂고 고정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판 것으로도 보인다. 아직 공부가 부족해 이게 무엇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사진 외에 여러 곳에서도 그런 게 발견되어 열처럼 이어져 나가는 게 희한하다. 이게 도대체 무엇을 뜻하고, 왜 이러한 것을 만들어 놓았을까? 이에 궁금함을 느끼며 천천히 바위를 둘러보고 바위에서 내려왔다.

a 감부도. 혹은 감보도라고도 한다. 난중일기에 보면 이 감부도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기록에는 적선 2척이 이곳으로 와서 조선군의 상황을 염탐한 후에 군사를 보냈다고 한다.

감부도. 혹은 감보도라고도 한다. 난중일기에 보면 이 감부도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기록에는 적선 2척이 이곳으로 와서 조선군의 상황을 염탐한 후에 군사를 보냈다고 한다. ⓒ 송영대

진도는 예로부터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선 지리적으로 볼 때, 서남해안의 중심이자, 크기도 큰 편이고 곡식이 자라기에도 적절하다. 무엇보다도 벽파진의 위치는 남해와 서해를 잇는 길목이라는 점에서 중시되어 왔다.

여기에는 오래전부터 해양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태봉시절 왕건은, 금성(지금의 나주)공략을 하는데 이게 큰 성공을 거두어 후백제의 진훤(견훤) 뒤에서 비수를 들이대는 역할을 하였다. 이 금성공략에서 세번째 공략의 목표가 바로 진도였다. 서남해안의 최대 섬인 진도를 점령함으로서 서남해를 공략해, 바다에서 진훤과 자웅을 겨루게 된 것이다. 그처럼 진도는 예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었으며, 벽파진은 그 중에서도 중심이었다.

삼별초의 항쟁에서도 가장 큰 싸움은 용장산성이기보다 벽파진에서의 싸움이었다. 이곳에서 여몽연합군과 삼별초는 서로의 자웅을 겨루었으며, 삼별초는 벽파진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력투구를 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의 계략으로 삼별초는 결국 패배하게 되었다. 이처럼 벽파진은 고려시대에도 그 중요성의 빛을 발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임진왜란에 와서도 이순신의 명랑해전의 무대가 울돌목이었으며, 이는 벽파진과는 연관이 된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벽파정 앞바다에서 해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벽파정은 지금은 사라져서 아쉬움을 더하지만, 실록의 기록을 좇는다면, 그만큼 벽파진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쉬이 알 수 있다.

벽파진은 역사적으로 연혁도 오래되고, 오랫동안 진도와 육지와의 교통로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들어선 진도대교가 생긴 이후, 그 역할을 다리에게 내어주고, 이젠 여객선과 화물선의 기착항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 역사와 함께해온 벽파진, 그러나 현대사회는 그에게 은퇴를 시키고 약간의 노후생활을 하게 해주고 있다. 그러나 벽파진은 그 중요성에 비해 크게 개발되지도 않고, 그 중요성에 대한 세세한 안내시설 및 관광시설이 부족하다.

유적지의 노후(?)를 생각해 편안히 보내라는 배려인가? 아니면 지방 지자체의 무관심인가. 사실 우리나라의 여러 항구유적 등은 그 역사적 가치에 비해서 꾸며놓기보다도 사장되기 일쑤이다. 진정 중요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또 그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려면 약간의 개발을 통한 관광자원화도 중요하다.

「충무공벽파진전첩비(忠武公 碧波津 戰捷碑)」의 내용

벽파진 푸른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의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고작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옥에서 풀려나와 삼도 수군 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십이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이 오십삼세되던 정유년 팔월 이십구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령하였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 상기도 십이척의 전선이 남아 있삼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매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하고 그대로 여기의 바다목을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십육일 동안 사흘은 비내리고 나흘은 바람불고 맏아들 회(薈)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구월초 칠일엔 적선 십삼척이 들어옴을 물리쳤으며, 초구일에도 적선 이척이 감보도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살피다가 쫒겨났는데, 공은 다시 생각한 바 있어 십오일에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적은 배로써 삼백삼십척의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길이 빛날 명랍대첩이여!

그날 진도 백성들은 모두 달려나와 군사들에게 옷과 양식을 나누었으며 이천귀, 김수생, 김성진, 하수평, 박현, 박희령, 박후령과 그의 아들 인복 또 양응지와 그의 조카 계원 그리고 조탁, 조응량과 그의 아들 명신 등 많은 의사들은 목숨까지 바치어 천추에 호국신이 되었나니, 이는 진실로 진도민의 자랑이로다.

이 고장 민속 강강술래 구슬픈 춤과 노래는 의병의 전술을 알려주는 양 가슴마다 눈물 어리고 녹진, 명양 두 언덕 철쇄 걸었던 깊은 자욱엔 옛 어른들의 전설이 고였거니와 이제 다시 이곳 동포들이 공의 은공과 정기를 영세에 드높이고자 벽파진두에 한덩이 돌을 세움에 및여 나는 삼가 끓어 엎디어 대강 그 때 사적을 적고 이어 노래를 붙이노니 열 두척 남은 배를 걷우어 거느리고 벽파진 찾아 바닷목을 지키실제,

그 심정 아는 이 없어 눈물 혼자 지우시다 삼백척 적의 배들 산 같이 깔렸더니 울도목 센 물결에 거품같이 다 꺼지고 북소리 울리는 속에 저 님 우뚝 서 계시다. 거룩한 님의 은공이 어디다 비기오리. 피흘린 의사 혼백 어느 적에 살아지리. 이 바다 지나는 이들 이마 숙이옵소서.

단기 사천이백팔십구년 팔월 이십구일 노산 이은상 글을 짓고, 소전 손재형은 글씨를 쓰고, 진도 교육구 교육감 곽충로는 구내 교직원 생도들을 비롯한 모든 군민과 도내 교육 동지들의 성력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 / 충무공벽파진전첩비

덧붙이는 글 | 2007년 5월 11일 진도답사 후 쓴 기행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2007년 5월 11일 진도답사 후 쓴 기행문입니다.
#진도 #벽파진 #이순신 #감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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