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비엔날레 재단 건물.광주드림 임문철
백남준은 '예술은 고등사기'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고도의 문화정치를 통해서 예술적 기호와 실천과 인식들을 공론의 장으로 쏟아내는 틀이기 때문이다.
예술인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인정시스템'에 진입시키기 위해서 분연히 실험과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과정이 아무리 고난과 역경을 강요한다고 해도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가난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백남준이 말한 예술의 장에 관한 정당한 해석일 것이다.
신정아 사건을 놓고 미술계 안팎에서 한 개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이 높다. 그러나 비판보다는 자성이 필요하다. 신정아 개인은 교수와 감독직의 임용이나 선정과정에 학력위조 행위가 위법한 것이었는지를 가리는 절차를 거쳐서 응분의 책임을 질 것이다.
학위위조라는 최악의 수를 썼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해갈 수 없지만, 신정아씨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신정아씨를 길러낸 것은 그의 욕망이기도 하겠거니와 미술계의 구조이기도 하다. 그가 이토록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미술계의 시스템이 그를 인정하고 수용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예술은 '인정시스템'에 의해서 작동한다. 어떤 작품이나 전시를 얼마나 폭넓은 비평적 관점 속에서 읽어내고 그것을 우리의 감성과 인식의 영역 속에서 용인하고 수용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상징투쟁을 벌이는 장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놓고 보건대 대한민국 미술의 장은 작품이나 기획·담론을 놓고 경쟁하는 곳이 아니었다. 10여 년 전부터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른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얼마나 허약한 지반 위에 서 있는지 만천하에 드러났다. 좋은 큐레이터를 길러내는 시스템이 부재한 상태에서 큐레이터를 열망하는 낱낱의 욕망들만이 반짝거리고 있지 않은가.
이번 사건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미술계가 나눠 가져야 할 뼈아픈 상처이다. 그를 수석큐레이터로 길러낸 금호미술관이 있다. 짱짱하게 잘 나가다가 근 몇 년 사이에 미술인들 사이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성곡미술관도 있다. 임용공고도 없이 특채로 그를 교수직에 앉힌 동국대학교도 있다. 월간미술대상 수상자로 선정한 월간미술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있고, 하나은행도 있다. 그리고 그 끝에 광주비엔날레가 있다.
광주비엔날레가 파행을 겪는 이유
광주비엔날레가 이러한 파행을 겪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광주비엔날레를 둘러싼 미술정치는 현실정치와 너무 밀접하게 맞닿아있어서 문제다. 미술이 사회의 제반 영역과는 고립된 별개의 장이 아니라 치열한 문화정치의 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현실정치의 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광주비엔날레는 동시대의 치열한 예술담론을 중심으로 담론투쟁과 상징투쟁을 벌이는 장이 아니라 현실정치의 온갖 음험한 컨센서스를 재생산해내는 장이다.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선임과 취소로 이어진 일련의 사태는 광주지역 미술인들과 광주지역 바깥의 미술인들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희대의 희극이자 비극이다. 학력위조 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는 예술감독으로서의 자질을 따지지 않은 인사 관행에 있다.
만약 학력 위조문제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그냥 그렇게 넘어갔을 것이다. 차제에 광주비엔날레재단 이사회의 파행적인 운영과정에 대해서 철저하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감독선정과정에 관한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미국 명문 사립대를 졸업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미술을 바라보고 있고, 광주비엔날레의 현실에 어떻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느냐가 잣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은 그러한 원칙을 무시했다. 재단 이사회에서 꾸린 감독추천위원회의가 걸어온 갈지자 행보를 잠시 들여다보면 이렇다. 1차 회의에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 평론가를 후보로 세웠다가 선정자를 내지 못했다. 2차 회의에서는 두 명의 후보를 올렸다가 한 명이 특정 조건을 내세워 거절하자 다른 후보자에게는 의사타진을 하지 않은 채 선정자 없음 결정을 내렸다.
일이 다급해지자 3차 회의에서 단 한 표를 얻은 후보자를 이사장 직권으로 선정했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불거져 나온 얘기들을 종합해보니 가관이다. 지역의 인사여서도 안 되고 지역을 무시하는 외부인사도 안된다는 후문이다.
로비를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이며, 광주의 인사들에게 잘 보여야 하지만 서울의 인사들에게도 낙점을 얻어야 한다. 기획자로서의 자질보다 중요한 것은 외국인 감독과 파트너십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고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찾아낸 예술감독이라면 광주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문화적 맥락 속에서 예술적 소통을 이루겠다는 건강한 사고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광주비엔날레라는 국제적 이벤트에 한몫 끼어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겠다는 기획자는 많아도 광주의 지역성을 바탕으로 타 지역과 연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기획자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광주비엔날레에 광주 정신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