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사관 통해 왕 침실 엿보려 했으나

[푸른깨비의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⑬] 사관과 임금 이야기

등록 2007.07.25 10:00수정 2007.07.2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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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 한 가지는 꼭 있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무촌(無寸)'이라고 하는 부부지간에도 살다보면 한두 가지의 비밀이 생기고 그것을 무덤 속에까지 짊어지고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라는 녀석은 꼭 감추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는 습성이 있나봅니다.

그래서 가끔씩 그 비밀이 세상에 공개되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비밀의 힘에 밀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수렁에서 헤매기도 합니다. 뭐 요즘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대선후보들에게도 그 비밀의 힘은 수만 가지 상상력과 힘을 더해 대중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만들지요.

그렇다면 조선시대 임금들도 과연 비밀이 있었을까요? TV 사극을 보면 늘 승지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과 하루 종일 함께 보내고, 밤이 되어도 방문 밖에는 내시와 궁녀들이 토끼처럼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임금의 안위를 걱정했는데 정녕 그에게도 비밀이 있었을까요?

사관, 그는 임금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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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이 서총대에 친림하여 문무시예를 시행한 어느 날 남응운이 글짓기와 활쏘기에 모두 으뜸으로 뽑혀 말 두 필을 상으로 하사 받은 고사를 그린 <명묘조서총대시예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밖으로 나가도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는 사관이 있었습니다. 사관은 요즘 유행어인 왕의 '껌딱지'일지도 모릅니다. ⓒ 문화재연구소 소장

예로부터 임금이 살던 곳은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 하여 겹겹이 문으로 막은 깊은 궁궐이라 합니다. 이처럼 궁궐 안에서 펼쳐지는 일들이 쉽사리 밖으로 전해지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오직 사관만큼은 궁궐 안에서 일어나는 일, 다시 말해 임금과 관련된 모든 일을 직접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조선의 문예 부흥기였던 세종시대 때 대사헌 오승은 임금께 말하기를 "사관은 당시의 착한 일과 나쁜 일을 기록하여 뒷세상에 포창과 폄론을 전하게 되니, 진실로 관원의 정원을 많이 두어서 견문을 넓히지 않는다면, 정령의 잘 되고 잘못된 것과 민생의 기쁨과 근심을 어찌 능히 다 써서 자세히 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사관의 직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사관의 눈과 귀를 통해서 들어온 정보는 곧 글로 옮겨졌고 이후 왕조실록을 비롯한 다양한 사서에 그들의 생생한 증언이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경우는 춘추관의 관원들이 사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정1품인 영사에서부터 정9품인 기사관까지 약 60여명 정도가 궁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의 직책은 상당 부분 겸직이었기에 삼정승들을 비롯한 상당 부분의 고위관료들도 사관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도 사람인지라 어디 자신의 모든 사생활이 전부 공개되는 것을 원했겠습니까. 더군다나 가끔 화도 내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등 소위 말해 '쪽팔리는 일'을 했을 경우 그것이 후세에 전해진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으니 임금의 삶도 결코 녹녹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연산군, '내가 왕인데, 사관 하나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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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궁인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것으로 동궐도의 모습입니다. 보통 일반 관청들은 궁궐 밖에 위치했으나, 사관들이 근무했던 춘추관은 임금의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했기에 궐내에 있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춘추관이 보일 지도 모릅니다. ⓒ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역사의 패륜아라는 이름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지 12년이 되던 해, 연산군은 생활을 돌이켜 보다가 문득 이렇게 사는 것이 역사에 기록된다면 욕먹을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는지 신하들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내용인즉, 춘추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그가 설사 악행을 했을지라도) 꺼리어 숨기고 피한다'고 하며 임금인 자신을 어버이로 본다면 신하들이 자신의 악행을 기록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쌩뚱맞은' 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신하들을 비교하면서, 왕의 일은 하나하나 사관들이 기록하는데 신하들의 잘못된 점은 기록하지 않는다고 푸념어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고는 대뜸 앞으로는 사관에게 임금의 개인적인 일은 쓰지 말고 오직 정사에 관련된 내용만 기재하라고 하며 임금은 역사에 속박당할 수 없다고 억지 주장을 펼쳤습니다. 연산군은 또 사관들이 임금이 처리하는 일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적는 것은 부당한 것이고, 특히 임금에 대해 비방하는 의견을 글로 남기는 것은 간신보다도 못한 것이라며 사관들을 압박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당시 승지였던 강혼은 그에 본분을 잊은 채, 연산군의 의견에 적극 동조한다며 두 손을 들고 맞장구를 쳐줬습니다. 그런데 강혼은 이미 직제학 시절부터 연산군이 뻔뻔하게도 학문을 모두 이뤘으니 경연은 안 해도 좋겠다는 의견에 적극 동참하며 승지 박열과 더불어 연산군의 '딸랑이'로 이름을 날린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산군은 이미 몇 해 전에 예문관 소속 사관으로 있었던 검열 엄성에 대하여 "사필을 잡는 임무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관직을 바꾸라"라고 하며 마음에 들지 않은 사관에 대해 정리 작업을 하려 했습니다. 당연히 승정원에서는 사관을 함부로 자르거나 교체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라고 하며 한사코 임금의 명을 거부하였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연산군은 그 특유의 괴팍한 성질을 부리며 "내가 명색이 임금인데, 일개 사관 하나를 처리하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며 있는 성질 없는 성질을 모두 부리며 반대의견을 묵살하고 그를 쫓아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상황이 이 정도니 중종반정이 왜 일어났는지 대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여자 사관 도입은 좌절됐지만...

이렇게 반정이 일어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젠 상황이 역전되어 신하들이 오히려 임금을 구속하기 위하여 여자 사관을 둬 임금의 침실까지도 염탐해 보려 했습니다.

당시 동지사 김안국은 임금의 아침 경서강의 시간에 중국의 태후와 신종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여자 사관을 도입하자는 주장을 살포시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당시 관료들의 감찰업무를 담당했던 장령 기준은 한 술 더 떠서,

"임금은 깊은 궁궐 속에 거처하므로 그 하는 일을 바깥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여사(女史, 여자 사관)를 두어 그 선악을 기록하게 하였으므로, 비록 깊숙한 궁궐 속의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에서일지라도 감히 방과하지 못했던 것이니, 모름지기 고제에 따라 여사를 두는 것이 가합니다." <중종실록 35권, 14년 4월 을유>

라고 하며 중종을 압박하기에 이릅니다. 아직 잠이 덜 깬 아침부터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중종 또한 민망한 사안이라는 것이 퍼뜩 들었는지, 곧 바로 "옛날 여자들은 글을 잘 지을 줄 알아서 사관으로 쓸 수 있었으나, 요즘은 글에 능한 여자들이 드물어서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소"라고 하며 궁색한 반대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그런데 보통 왕이 이 정도로 싫은 내색을 하면 신하들도 대부분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고 말았는데, 이 날은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일을 맡아보는 시강관 이청까지 나서서 한문을 모른다면 언문을 써도 좋으니 여자 사관을 도입하자고 한사코 주장하였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딱히 뭐라 할 말도 없었던 중종은 이젠 어느 유행가의 한 대목처럼 "마음씨가 바른 여자를 뽑아야 한다"며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말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대뜸 신하들에게 너희들이 어진 사람을 추천하지 못해서 발생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며 면박을 주고는 아침 강의를 대충 얼버무려 버렸습니다.

이렇게 조금은 황당하게 회의가 마무리 되었고, 여자 사관은 끝내 들이지 못했습니다.

이후 선조 대에 이르러서 선조가 감기 몸살에 시달려 정사를 살피지 못할 때 여자 사관들이 대신들의 문서를 대신 받아 왕에게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면 여자 사관이 많은 역사기록을 남기지는 못했을지언정 일정 정도 그녀만의 일을 담당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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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 시대의 궁궐을 배경으로 펼쳐진 광대들의 푸진 한판 놀음을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멋지게 만든 영화 <왕의 남자>의 한 장면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사관의 말처럼 연산군은 '미치광이 같은 방탕'으로 인간사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 이글픽쳐스

이처럼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던 사관들은 조선왕조실록에 그들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실었습니다. 왕조실록에서 사관들의 이야기는 '사신은 논한다'는 구절로 중요한 장의 맨 하단에 기록되어 있는데, 비록 반정으로 폐위되어 실록 대신 일기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지만 <연산군일기>를 보면 영화 <왕의 남자>에서처럼 왕이 쓸데없이 사냥을 다니는 것을 두고 사관은 이렇게 논했습니다.

"왕의 미치광이 같은 방탕이 이미 극도에 달하여 모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사방에 잡아바치도록 독촉하고, 사신을 보내어 공헌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산이나 바다의 기괴한 족속을 새장이나 우리에 메고 길을 이었으며, 무사들을 파견하여 범·표범·곰·말곰 등속을 산채로 잡아 다 후원에 가두어 놓고, 혹은 고기를 먹이며 구경하기도 하고 혹은 친히 쏘아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으며, 돼지·노루 같은 유는 산속에 놓아두고 준마를 타고 달리며 쫓아 비탈과 골짜기의 밀림 속을 드나들기를 조금도 차질이 없이 하여, 비록 수렵으로 늙은 자라 할지라도 더 나을 수 없었으며, 날로 공·사의 준마를 징발하여 용구에 모으므로, 민간이나 역로에 이름난 말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연산군일기 56권, 10년 11월 정유>

이처럼 왕의 행실을 '미치광이 같은 방탕이 이미 극도에 달했다'라고 하며 쉼 없는 독설을 내뿜었던 그들은 아마도 역사상 최고의 비판가였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청와대에 조선시대 사관들처럼 역사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대통령에게 직언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비록 임기 말이지만 그 한 사람이 아쉬운 때입니다.

덧붙이는 글 | 최형국 기자는 중앙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전쟁사/무예사 전공)를 수료하고 현재 무예24기보존회 시범단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무예 홈페이지 http://muye24ki.com 를 운영합니다

덧붙이는 글 최형국 기자는 중앙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전쟁사/무예사 전공)를 수료하고 현재 무예24기보존회 시범단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무예 홈페이지 http://muye24ki.com 를 운영합니다
#사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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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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