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42회

등록 2007.07.25 08:12수정 2007.07.25 08:12
0
원고료로 응원
89

운무소축에서 이리도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를 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껏 수년 전 부친인 보주를 비롯해 동정오우가 모두 모였을 적에 딸로서 대접을 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듯 낯선 사내들에게 저녁을 대접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 누구도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터였다.


항상 조용하던 운무소축의 식탁이 비좁을 정도였다. 모두 열하고도 한명이 남았다. 함곡과 풍철한 일행이 모두 여덟이었고, 우슬과 무화, 그리고 귀산노인이 자리했다. 이렇듯 많은 손님을 초대해 본 적이 없었고, 그러리라 생각한 바도 없었고, 사실 앞에 놓인 식탁은 일곱 명이나 여덟 명 정도가 적당한 크기였기 때문에 더욱 비좁아 보였다.

"자네는 몹시 불편한 모양이군."

풍철한이 함곡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핀잔조로 말한 것이 아니라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으응... 아닐세."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함곡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산동요리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하고 정갈해 보이는 요리들이었는데 함곡은 그저 한두 가지 맛을 보았을 뿐 먹지 않고 있었다.


하기야 지금 함곡으로서는 음식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뭔가 일이 틀어지고 있었다. 사소한 것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자신을 믿고 혈서 속에 장인을 날인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위험을 가져오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전갈이 오지 않는 상황이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끈이 끊어져 버린 느낌이다. 이것은 분명 뭔가 일이 터지고 있다는 증거였고, 그것은 함곡이 생각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묵묵히 음식을 먹는 일보다 지겨운 일은 없을 것이다. 자연 분위기는 무거워지고 음식을 씹는 것도 고역일 정도였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우슬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약간 들뜬 억양으로 좌중을 둘러보는 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함곡은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듯 짐짓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억양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라면,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이제 남은 일은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그는 우슬에게서 시선을 돌려 귀산노인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으니..... 어르신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뜬금없이 꺼낸 함곡의 말에 좌중은 함곡과 귀산노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일까? 귀산노인은 음식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가 함곡의 말에 갑자기 목이 막히는지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함곡을 잠시 동안 응시했는데 그것은 함곡의 진심을 알아보기 위한 시간인 것 같았다.

"자네는 아직 노부가 한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네."

귀산노인이 함곡에게 부탁한 것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그것은 아마 부탁이 아니라 조건이었을 것이고 요구였을 것이다.

"시간이 없습니다."

함곡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대답할 시간은 눈 한 번 깜짝할 시간 밖에 걸리지 않네."

"이 안에서 모두 죽는 것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세상은 흘러가는 데로 놔두어야 하는 법이야.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반드시 대명(大明)을 위한 일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겐가?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힘의 공백은 어쩔 셈인가?"

두 사람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들었다. 아마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두세 명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만.... 어르신의 부탁은 소생으로서 자신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확답을 드리지 못할 뿐이지요."

"신의를 지키기 위함이겠지."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또한 어르신께서도 약조하신 바 있었잖습니까?"

그 때였다. 슬그머니 무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우슬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짓을 하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우슬의 표정이 변했다. 허나 표정이 변한 것은 우슬만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인물들의 표정이 굳어들었다.

객(客)된 도리로서 무화처럼 나설 수는 없었지만 그들 역시 뭔가 이상한 기미를 감지했던 것이다. 좌중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함곡이 자신의 여동생 선화를 바라보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몰려들고 있군요."

그 말에 함곡은 지금까지 자신이 걱정하고 있었던 사태가 벌어졌음을 알았다. 저들은 모든 것을 안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이제 대놓고 일을 벌이려 할 것이었다.

"어르신께서도 이제는 피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귀산노인이 메마른 웃음을 피어 올렸다.

"천하의 함곡이 다 죽어가는 노인을 붙들고 협박까지 하는군."

함곡 역시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귀산노인의 시선이 우슬에게로 돌아갔다.

"노부 역시 능력이 없어..... 이제는 저 아이만이 해결할 수 있을 걸세. 부탁은 노부에게 하지 말고 저 아이에게 해봐."

우슬은 미소를 지었다. 살짝 이를 보이고 짓는 미소였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매우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였다. 함곡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우슬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우슬 역시 혈서에 장인을 찍은 사람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

사부와 다섯 제자가 모두 모여 식사를 한 자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제자들 간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사부의 앞에서는 항상 우애 있는 사형제였지만 운중각을 나서면 다른 마음이었다.

어쩌면 제자로 발탁될 때부터 정해진 숙명인지도 몰랐다. 어차피 운중보에 입보한 이유가 보주의 눈에 들어 운중보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나가 아니라 다섯이라면 하나뿐인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왜들 먹는 것이 시원치 않구나.... 입맛들을 모두 잃은 게냐?"

언제나 자애한 사부였다.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 다른 사부들처럼 일일이 가르쳐주고 다독거리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막힌 곳을 몇 마디로 트이게 하는 사부였다. 사실 이미 제자로 발탁될 때에는 모든 무공의 기초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들에게는 심득(心得)이 중요한 것이었지 몇 가지 초식이나 고절한 다른 무공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는 매우 훌륭한 사부였고, 언제나 사부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아닙니다. 사부님께서 말씀이 없으셔서....."

장문위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대제자로서 나서기는 했지만 지금 사제들의 마음속이 어떤지 모를 리 없다. 불쑥 오늘 모두 모이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혹시 사부는 이 자리에서 후계자를 결정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 2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3. 3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4. 4 한강 노벨상에 숟가락 얹는 보수, 그들에게 필요한 염치 한강 노벨상에 숟가락 얹는 보수, 그들에게 필요한 염치
  5. 5 윤 정부가 일선부대에 배포한 충격의 간행물 윤 정부가 일선부대에 배포한 충격의 간행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