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43회

등록 2007.07.26 07:49수정 2007.07.26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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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무엇보다 지금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고 있을 것이다. 몸이 이 안에 있지만 마음은 벌써 밖에 가있다. 자칫 사형제 간에 칼을 맞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허허... 너희들을 부른 것이 무에 특별한 일이라고.... 내일은 손님들과 있어야 할 것 같아 오늘만큼은 너희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오랜 만에 너희들과 술도 한 잔 하고 싶어졌고...."


단지 그런 이유에서였던가? 어차피 사부가 화갑연을 마치고 운중보를 떠난다는 사실은 이미 공표된 것이었다. 회갑연을 마치자마자 떠나시려고 그러는 것일까? 그래서 미리 제자들과의 오붓한 시간을 갖길 원하신 것일까?

누구 하나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단지 그런 이유라면 뭔가 기대를 걸고 왔던 그들에게는 실망스런 일이었다. 허나 장문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술병을 두 손으로 들어올려 포권을 취하듯 앞으로 내밀었다.

"제자가 사부님의 수연을 맞이하여 잔을 올리겠습니다."

사부님의 뜻이 그저 제자들과 단란한 시간을 가지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들어드려야 한다. 그것이 제자된 도리다. 잔을 올리기 전 먼저 춤이라도 추어야 하겠지만 그런 자리가 아닌 터. 사부의 앞에 놓인 잔에 공손히 술을 따른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잔에 따르기 시작하자 사제들 역시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채운다. 사부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감돌자 제자들 역시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사부와 제자, 그리고 사형제 간이란 사실마저도 이기심과 탐욕에 망각해 버린 자신들이 부끄러웠을까?

"사부님의 수연을 경하(敬賀)드리옵니다."


사부가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향하자 동시에 외치며 모두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사부가 잔을 비우자 제자들 역시 들고 있던 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이 순간만큼은 그저 다른 것을 잊고 순수하게 사부와 제자, 그리고 사형제 간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제자 역시 사부님께 잔을 올리겠습니다."


둘째로서 두 번째 잔을 올린다. 언제나 둘째요, 두 번째라는 것이 싫은 그였지만 서열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정해진 것이다. 옥기룡이 사부의 잔을 채우자 또 다시 나머지 제자들도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운다.

사부가 만면에 그득하게 미소를 지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떠한 사정이 있든 간에 이들은 자신의 제자들이다. 부모와 사부된 마음이 같다. 이들만큼은 세상풍파나 고초를 겪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야 술맛이 나는 것 같구나......."

사부는 잔을 치켜들며 제자들을 쭉 둘러보았다. 제자들의 얼굴에 죄송스러움과 송구스러움이 겹쳐 떠올랐다. 사부가 잔을 죽 들이키자 제자들도 일제히 잔을 비웠다.

"이 사부는....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잔을 놓고는 입을 열었는데 평상시와는 달리 잠시 뜸을 들였다. 제자들의 시선이 사부의 입에 집중되었다.

"이 사부와 같은 업보(業報)를 지고 살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자유롭게 너희들의 꿈을 펼치고... 또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있다."

".............!"

제자들은 숨을 죽였다.

"이 운중보는 존재하지 말아야 할 곳이었다. 아예 만들지도 말아야 할 곳이었지. 허수아비 같은 천하제일인의 보좌가 무슨 소용이 있었으랴......!"

셋째 모가두가 술병을 집으려 하다가 계속 이어지는 사부의 말에 멈칫거리고 있었다. 이제 자신이 따라야 할 차례다. 허나 장문위와 옥기룡, 그리고 추교학의 얼굴이 굳어들고 있었다. 사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무림은 무림인의 것이 되어야 한다. 무림은 협(俠)과 의(義)가 살아있는 곳이어야 한다. 운중보란 틀에 억매여 모두 눈치나 보는 그런 곳이 되면 안 되는 일이지. 정의(正義)가 단지 힘에 의해 결정되는... 누구의 말 한마디로 불의(不義)가 정의가 되는 곳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미 사부의 공허한 시선은 제자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과거의 어는 한 시점으로 가서 머물고 있는 듯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용추의 시선은 운무소축에 정지되어 있었다. 보주의 존재로 인하여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최선의 결론은 역시 이것이었다. 이미 결정되었고 잠시 후 운무소축은 운중보에서 완벽하게 사라질 것이었다.

이미 운무소축은 모두 에워싼 상태였다. 저들이 도망갈 길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저기에는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함곡이 있었고, 그 능력을 추측하지 못하게 하는 귀산노인이 있었다. 어떠한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해야 했다. 마지막 점검만 끝나면 시작이었다. 바로 저들이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비밀통로의 장악이 그것이었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지시만을 기다리며 주시하고 있다.

".............!"

운무소축에서 오 장여 떨어진 곳에서 반짝 불빛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비밀통로마저 장악했다는 신호였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혈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용추는 옆에서 지켜보는 상만천과 추산관 태감을 보았다.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떡이자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슈우우우----

운무소축의 사방에서 주먹보다 큰 덩어리가 십여 개 창문 안으로 쏘아 들어갔다. 그러자 금방 창문을 통해 시커먼 연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용추가 바람 부는 방향을 계산해 다시 손을 들어 휘젓자 서쪽에 있던 인물들 서넛 정도가 운무소축에서 더 물러나고 있었다.

저 연기는 독연(毒煙)이었다. 맡으면 일각 내로 기도(氣道)를 녹여 죽게 만드는 지독한 것이었다. 해독약이 없는 터라 자칫 자기편마저 살상할 수 있는 것이어서 사용에 있어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사람이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각이 얼마나 될까? 이제 그 시각만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참지 못한다면 튀어나올 것이고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순간 그들은 살육당하기 시작할 것이다.

뛰쳐나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누어 준 네 알의 뇌화탄(雷火彈)은 운무소축 정도를 통째로 날려버릴 것이고 모두 태워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저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함곡.... 미안하네.... 자네와 갈 길이 다를 뿐이네.'

용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함곡이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용추였지만 함곡이 있는 한 최고는 될 수 없었다. 이제 함곡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구국(救國)의 지사(志士)라면 해야 하는 일이라 인정할 수 있었지만 용추가 추구하는 것과 함곡이 추구하는 것은 달랐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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