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 만난 노태우, 부시 만나는 이명박

[손석춘 칼럼] 한국 대선 앞둔 미국 대통령의 다목적 개입

등록 2007.10.01 10:06수정 2007.10.0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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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30일 오후 '2007 청계천 축제'가 열리는 청계천을 방문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30일 오후 '2007 청계천 축제'가 열리는 청계천을 방문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권우성


미국의 외교정책을 조금만 비판해도 색안경을 쓰고 흘겨보는 이들에게 미리 밝혀두고 싶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올곧게 구현해나가려면 도리 없이 미국의 힘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 말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미국 탓으로 돌리자는 뜻이 아니다. 엄존하고 있는 미국의 힘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옳고 그름을 가려 대처하자는 뜻이다.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10월 중순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면담할 예정이다. 면담 자체를 두고 사대주의라고 예단하고 싶지는 않다. 이명박 후보가 최근 보여온 언행만으로도 그의 친미 사대경향은 이미 또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의 조지 부시 정권이다. 미국 대통령이 선거를 앞둔 나라의 야당 후보를 만나는 일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특히 한국의 '야당 후보'를 민감한 대선정국에서 만나기는 처음이다. 본질은 같지만, 옹근 20년 전에 레이건과 면담한 노태우는 집권 군부세력의 후보였다.

'부적절한 만남' 환영하는 '합리적 보수세력'

그래서다. 명토박아 두거니와 이명박-부시 면담은 '부적절한 만남'이다. 문제는 자칭 '합리적 보수세력'의 자세다. 수구세력과 차별성을 강조해온 <중앙일보> 사설이 대표적 보기다. 사설은 "유력한 차기 주자가 최대의 동맹국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갖게 된 것은 환영할 일"이라고 반겼다.

하지만 그것을 ‘환영’할 수 없는 까닭은 문제의 사설이 역설적으로 입증해준다. 사설은 “부시 대통령이 관례를 깨면서까지 이 후보를 만나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왜 미국은 이런 일을 했을까를 곰곰 되씹어야 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면담 시기를 보면 남북 정상회담 뒤를 이어서다.… 임기가 넉 달여밖에 남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이 무리한 일을 저지를 경우를 가정해 볼 수도 있다. 북한 핵 문제는 제쳐놓고 남북관계가 지나치게 과속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의미는 없을까."


그렇다. 기실 면담 시기만이 아니다. 남북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부시-이명박 면담 사실이 흘러나온 데 눈 돌릴 필요가 있다. 남북정상회담의 견제카드가 아닌가.

<조선일보>는 미국 백악관이 국무부와 상의 없이 면담을 결정했다고 보도했지만, 바로 그런 '역할 분담'이 미국의 치밀한 전략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이 시점에서 부시가 이명박을 만나는 게 12월 대선에서 명백한 지지 표시임을 백악관이 모른다면 그야말로 소가 웃을 일 아닌가.


우리가 새삼 짚어볼 것은 이명박 후보가 미국 대사를 만났을 때 12월 대선을 '친북좌파 대 보수우파의 대결'로 이르고 남북정상회담을 비난한 대목이다.

여기서 한국의 '보수우파' 또는 '합리적 보수세력'에게 묻고 싶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뒤 한·미 동맹이 과연 소원해졌는가. 심지어 <중앙일보>는 미국이 "오죽하면 전례에도 없는 일을 하려 하겠는가"라고 개탄한다. 이어 노 정권을 겨냥해 살천스레 다그친다. "외교적 무례를 범하면서까지 억지로 북한에 유리한 발언을 끌어내 무엇을 하려 한 것인가."

황당한 일이지만 한-미 정상회담에서 불거진 '통역의 실수'는 접어두자. 자국의 대통령이 상대국의 대통령과 빚은 사안을 두고 "결례"가 아니라 "무례"라고 무람없이 쓰는 보수 우파의 사고는 그들이 평소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금이 정녕 '한-미동맹' 위기인가

무엇보다 이제는 찬찬히 톺아볼 일이다. 노 대통령의 정제되지 못한 감정적 발언을 친미사대언론이 부풀려 보도하면서 벌어진 집단착시 현상에서 우리 모두 벗어날 때다.

노 정권 들어서서 이라크 침략전쟁에 파병, 평택에 최첨단 미군기지 건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 한미자유무역협정 협상타결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듯이 한국은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라 종속국가로 치달아왔다.

그럼에도 오늘이 '한-미동맹의 위기'라는 자칭 보수우파나 합리적 보수세력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게다가 저들의 등을 토닥이며 남북정상회담과 한국 대선에 다목적으로 개입하는 백악관의 조지 부시를 보라.

정녕 이 땅에 '보수우파'나 '합리적 보수세력'이 있다면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제발 색안경의 선입견 없이 오늘의 사태를 직시하기 바란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꼴이 이렇게 무너져도 괜찮은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남북정상회담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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