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박사가 되고 싶거든 이 책을 읽어라

[서평] 별 걸 다 아는 남자 성석제가 쓴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등록 2007.11.21 20:48수정 2007.11.2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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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쯤 전이었던가. 인터넷 서점에서 책 몇 권을 샀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건 국가 정보기관에서 세살배기 어린아이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가을에 책 몇 권이라도 읽지도 않고 그냥 지나간다면 그건 계절에 대한 '모독죄'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a  책 표지.

책 표지. ⓒ 하늘연못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다가 우연히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란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성석제가 여행 중에 맞닥뜨린 풍물에 대한 이야긴가? 그렇다면 여행기를 많이 쓰는 나에겐 꽤나 유익한 책이 될 것이다.


이 소설가는 여행기를 어떻게 쓸까. 내가 쓰는 여행기나 남이 쓰는 여행기나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가득한 여행기에 식상하고 있던 차였으니 "너, 잘 만났다" 싶기까지 했다. 성석제는 글 재미있게 쓰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잡학도사'나 '성노가리'라고 부를 정도다.

우리 속담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속담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을까. 그 자초지종이야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잔칫집에 가서 실컷 얻어먹고 와서 "그 집에 가니 먹을 것이 없더라"라고 투덜거린다는 건 좀 염치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소문난 소설가의 책을 사면 먹을 건 좀 있을까.

그래서 '피 같은 돈' 1만2000원을 주고서 과감하게(?) 책을 샀다. 아, 인터넷 서점에서 정가를 다 받더냐고요? 그런 난감한 질문은 물어보지 않기. 말해도 알고 말 안 해도 아는 사실을 갖고 설왕설래한들 입만 아프지, 안 그러요?

책을 여니, 먼저 작가의 말이 "이거 안 읽으면 못 지나가!"라며 길목을 막고 선다. 그래, 어디 한 번 뭐라고 설레발을 쳤는지 한 번 읽어나 볼까.

소설가는 소설을 씀으로써 독자에게 다가가고 대화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보석 같은 순간, 섬광처럼 터지는 웃음과 함께 알게 되는 일상의 비의를 소설에 다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아까운 이야기, 모두 다 알고 있지만 나만 몰랐던 어떤 것, 보고 들으면 유쾌하고 흥미로우며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지는 생각과 느낌을 담으려고 했다.(책 6쪽~7쪽)


그런데 아뿔싸. 책을 읽어가니, 이건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 중에 듣고 본 새롭고 신기한 풍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반품을 시킬 것인가, 아니면 폐지 처리할 것인가. 열심히 읽어두면 언젠가 내 여행기 속에서 감칠 맛나는 국물이 될는지 누가 아는가.

혼자만 아는 이야기와 나만 몰랐던 이야기


책은 전체 4부로 나누었다. '이야기의 힘'이라는 제목 아래 묶인 첫 번째 장은 우리 삶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재미난 콩트 식으로 적었다. 식사 예절, 가정교육, 가짜 명품, 처세술 따위에 대한 이야기가 에피소드와 함께 실려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별명을 의식하고 썼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 최고의 이빨꾼"이라는 이야기도 끼워 넣었다. '구라'니 '노가리'니 하는 말들의 어원을 설명해 나가다가 맨 마지막에 이르러선 세계 최고의 '이빨꾼'은 긴일각고래라고 알려주면서 끝낸다. 모두 키득키득 웃으면서 가볍게 읽을 만한 이야기들이다. 이게 그가 말한 '일상의 비의'인지는 잘 모르겠다.

'관점에 따라 다르다'라는 제목을 단 두 번째 장은 우리의 잘못된 상식을 허점을 정리해주려는 그의 충정이 담긴 장이다. '어린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소설가의 배려려니 하고 첫 번째 장보다 좀 더 신경 써 읽었다. '보리수에는 보리가 달리지 않는다', '벌도 임차료를 낸다' 라는 글이 대표적이다.

'오후의 국수 한 그릇'이란 제목을 단 세 번째 장엔 다양한 먹을거리들을 섭렵한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다. 헛제삿밥, 전주비빔밥, 절밥, 털게, 송이, 호박김치, 새끼돼지 요리 등. 이 책에서 가장 맛있고 감명깊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장이라고나 할까. 정 시간이 없는 분들은 세 번째 장만 읽어도 책값 본전은 뽑을 수 있다. 결코 장려할 일은 아니니, 아무리 조르더라도 며느리에게는 알려주지 마라.

'문자의 예술'이란 제목을 붙인 마지막 장엔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그릇되게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문자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내 이름을 돌려다오'라는 글 속엔 감자와 고구마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다.

영어로 고구마는 'sweet potato'이고 감자는 그냥 'potato'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고구마는 '단 감자'가 된다. 요즘도 제주도의 촌로들은 고구마를 감자, 또는 감저라고 부른다. 감자는 지슬 또는 지실이다. 불쌍한 고구마, 제 이름을 언제나 찾아먹을까. (327쪽)

이름도 찾아 먹는 것이라는 걸 안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망외의 소득이다. 나도 먹을 것 없을 땐 내 이름이나 찾아 먹어야지.

유쾌한 발견까지는 아닐지라도

성석제의 이야기에는 그냥 단순히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 속에는 세상 이치와 진실, 삶의 모순과 오류를 꿰뚫어 보는 힘이 있다. 그만이 가진 날카로운 통찰력과 해학이 그의 글을 읽는 재미다. '유쾌한' 발견까지는 아닐지라도 재미있게 읽을 만하다.

또 이 책에는 자연과 문명과 인간과 인간다움에 관한 작가 나름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결론은 버킹검일 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에겐 아주 엉뚱하게 샛길로 빠지는 결론으로 한 방 먹여주는 재미도 있다. 물론 그가 쓴 글의 제목처럼 '웃기는 짜장' 같은 이야기도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한 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책의 제목이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란 제목 대신 <성석제가 쓴 이야기 박물지>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건 별로 좋은 독자가 못 되는 내가 심봉사 문고리 잡듯 찾아낸 '유쾌한 발견'이라고나 할까.

덧붙이는 글 |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성석제/하늘연못/12,000원


덧붙이는 글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성석제/하늘연못/12,000원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 개정판

성석제 지음,
하늘연못, 2013


#성석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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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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