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솔로몬 지혜도 안 통하는 민주노동당

지금 분당은 진보정당 성과부터 날리고 보자는 것

등록 2008.01.05 11:25수정 2008.01.0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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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ont color=a77a2>분열이냐 수습이냐... 민주노동당은 어떤 길을 가게 될까. 2008년 1월 1일 낮 서울 영등포 중앙당사에 열린무자년 새해 단배식에서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건배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순영, 천영세, 심상정, 노회찬 의원)

분열이냐 수습이냐... 민주노동당은 어떤 길을 가게 될까. 2008년 1월 1일 낮 서울 영등포 중앙당사에 열린무자년 새해 단배식에서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건배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순영, 천영세, 심상정, 노회찬 의원) ⓒ 황방열


민주노동당의 대선 참패 이후 위기는 오히려 깊어가는 모양새다. 현 민주노동당으로서 상징적 의미에 가까웠던 대선보다 이제 실제 몇 석이냐는 성과를 얻어야 하는, 실질적으로 더욱 중요한 총선이 다가오고 있지만 당의 존립위기까지 거론되고 있다. 내로라하는 논객들의 민노당 분당 논란을 둘러싼 가시 돋친 설전까지 오가고 있다.

인물 중심의 구태정치가 반복되고 실제 정책 중심 정치의 기반이 되어야 할 정당구조가 취약한 우리 정치에서 제대로 된 근대적 정당구조를 갖춘 유일한 정당인 민주노동당에 그동안 큰 기대가 없을 수 없었다. 물론 이번 대선의 경우 종파싸움에 얼룩져 참패가 오래 전부터 예고됐었지만, 그만큼 곪아터진 환부를 도려낼 기회가 오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희망 있던 '심상정 비대위'의 무산

선거 직후, 참패한 민주노동당이 그나마 얻은 최대 성과인 심상정 의원을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방안이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자주파 지도부에서 말하자면 상대 정파라 할 수 있는 심상정 의원을 중심으로 한 혁신기구를 제안했으니 스스로 책임을 자인한 셈이기도 했다.

심상정 의원도 긍정적 신호를 보내면서 얼굴 마담이 아닌 실질적 권한이 있는 비대위여야 할 것을 전제조건으로 달았다. 현 위기상황을 보자면 응당한 요구였고, 지역구 출마계획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하는 심상정 의원으로서도 정치적 생명을 걸 수밖에 없는 만큼 합당한 요구였다. 개인적으로 '이 제안을 지도부가 받으면 그래도 활로가 열릴 텐데...' 하고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상황은 희망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기대 속에 열린 중앙위는 비대위 구성에 실패했다. 한때 심상정 의원과 지도부 사이에 극적인 비대위 구성안이 합의되었지만, 평등파 측 중앙위원들이 '종북주의 청산'을 주장하고 자주파 측은 다시 합의된 비대위안을 거두어 들이면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이 난 것이다.

대선 패배를 비롯한 현 민주노동당 위기의 1차적 책임이 자주파 지도부에게 있었다면, 현재 당 혁신을 가로막는 1차적 원인이 분당론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쪽에서 당을 깨자는 사람들이 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저쪽이 당을 깨려고 명분 쌓기 한다는 의심이 있는 한 서로 양보하고 합의하는 혁신안이 나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현 민주노동당 혁신의 걸림돌은 '분당론'

그렇게 중앙위가 무산된 후, 그래도 위기는 극복하고 보자는 분위기보다는 분당론이 더 확산되는 모양이다. 분당을 위한 토론회가 개최되는가 하면, 단합을 주장하던 쪽에서도 조기 당직선거를 강행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당을 이 지경으로 만든 패권주의로 또 한 번 뻔한 결과를 낳을 당직선거를 주장하는 것은 또다른 분당론에 불과하다.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 그리고 많은 이의 희망을 담아 드디어 현실 정치에서 자리잡았던 민주노동당의 몰골은 그만큼 처참하다. 매우 서글프게도 민주노동당은 솔로몬의 지혜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 왔다. 아이를 반으로 자르겠다고 하는 마당에 두 부모가 자르면 어떠리 하고 있는 꼴이니 말이다.

해묵은 대동단결론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 선점(positioning)의 미학이란 말에 백 번 동의한다. 하지만 분당에 앞장서는 평등파가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고 패권주의적 성향이 덜하여 향후 더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손 치더라도 현재 선점의 미학을 발휘할 수 있는 세력인가는 아직 회의적이다.

평등파 최대 정파 '전진'의 현 집행위원장인 김종철 전 서울시장 후보가 선거 시절 읊조렸던 '사회주의' 구호가 이번 대선에서 나온 '코리아연방공화국'보다 나을 것은 없었다. 서울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당장 이야기해야 할 선거판에서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발휘하자'고 외친 것이나 민생경제가 핵으로 등장한 대선에서 난데없이 통일방안 같은 구호나 내세우며 '여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라고 외치는 자주파 인사나 서로 내용없고 엉뚱했긴 오십보 백보였다.

 지난해 12월 26일 오전 문래동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문성현 대표 등 참석자들이 지도부 총사퇴의 구체적 방안을 논의하는 모습.

지난해 12월 26일 오전 문래동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문성현 대표 등 참석자들이 지도부 총사퇴의 구체적 방안을 논의하는 모습. ⓒ 연합뉴스 한상균


진보신당 창당한들 사람들이 구분이나 할 수 있을까

거기다가 사람들은 분당론에 발언하는 인사들처럼 이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영국 정책 발달사를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하나 보게 되었는데, 요지가 그것이었다. 대처리즘의 등장으로 좌우간 이념논쟁이 한참이던 1980년대 문헌이었는데, 국가 축소와 가족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당과 국가 책임과 국가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노동당의 싸움이 한창이던 그 시절에 정작 사람들은 가족 가치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국가의 지원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대선 결과를 보더라도, 진보정치연구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민노당 지지자 중 권영길 후보를 찍은 사람이 23.5%에 불과했던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명박, 이회창 후보를 찍은 사람이 합쳐서 30%에 이르렀다. 민주노동당이 아무리 우리가 진짜 진보고 노무현 정부는 보수정권이라고 외쳐도 노무현 대통령이나 구 여권의 지지도가 떨어지면 민노당 지지율도 같이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던가.

상황이 이러한데 진보신당을 창당해 지금까지 이룩해온 진보정당의 자산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일하다.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한들 지지층이나 당원이나 '와'하고 몰려가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존 정치적 기반이 상당 부분 해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더 현실적이다. 보수여권과 민주노동당도 잘 구분 않던 사람들이 자주파 정당과 평등파 정당을 구분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 대중정당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대중에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치적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번 총선은 검증된 비례의원들이 지역구를 확보해야 하는 중대한 선거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을 넘어 '민주노동당'이란 이름으로 다져온 현실 정치의 지지기반은 더없이 소중하다. 더군다나 민주노동당은 지금 지난 선거에서 비례대표를 중심으로 10석을 확보하여 실질적 정치력을 일부 확보한 데 이어 그 기반을 공고히 하면서 한 단계 더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비례 대표로 검증된 의원들 상당수가 지역구에 출마할 준비를 하고 있고, 또 그 상당수는 당선을 기대할 만하다. 현실정치에서 더욱 의미있는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그런데 분당을 하거나 분당론에 시달려 정당 자체가 흔들리고 자리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총선을 맞이한다면 새로운 성과는커녕 있던 성과까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릴 공산이 크다. 진보정당운동의, 민주노동당의 가장 핵심적인 자산은 정당 그 자체인데 그 정당이 흔들린 상황에서 인물만 보고 표가 오기가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한 명이나 지역구에서 당선되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결국 지금의 분당론은 현 정치상황에서는 현재까지 진보정당 운동의 성과를 일단 날려버리자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이는 안 그래도 비전과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이 상황에서 진보정당이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상당 기간 동안 현실정치에서 퇴장하는 것을 의미하기 쉽다. 희망이 없고 암울한 상황에서 그나마 기대고 희망의 근거를 다질 기반조차 보통사람들의 눈에선 사라지는 것이다. 식자들끼리 뒤에서 무슨 의미를 부여하든 말이다.

종북주의 청산보다는 '선거강령' 제정으로 건설적 극복을

물론 어설픈 단합론은 역시 똑같은 자멸의 길임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그러기에 중앙위에서 합의되었던 '심상정 비대위' 안이 현 상황의 최선의 답일 수밖에 없다. 종북주의 청산을 들고 나오는 이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전 몇 번의 선거에서도 패배로 인해 책임질 세력이 다수파의 패권주의적 성향으로 인해서 선거에서 또 지도부를 차지하고 또 지도부를 차지해 버리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원리조차 작동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고 '종북주의 청산'이라는 네거티브적 방향으로 현 상황이 극복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비대위를 중심으로 '선거강령(election manifesto)' 제정을 추진해서 당의 정책방향을 선거에 맞춰 구체화하여 제시하는 방향으로 이 문제는 해소될 수 있고, 오히려 더욱 건설적인 방향으로 극복될 수 있다. 그리고 당헌 당규 개정을 통해 이렇게 합의된 방향이 향후 당 활동에 구속력을 가지게끔 할 수도 있다.

물론 서로 영원히 같이하지 못할 세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막 뿌리내리기 시작한 진보정당이 대선보다도 정치세력화에서 실질적으로 의미가 더 큰 총선을 바로 앞에 둔 상황에서, 일단 쪼개고 보자는 주장은 생각보다 더욱 큰 것을 통째로 잃게 할 수 있다. 정말 그런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긴 호흡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교각살우의 잘못을 범하기 쉽다.

선거강령이란
선거강령(manifesto)은 그동안 이른바 매니페스토 운동을 통해 예산까지 고려한 구체적 공약 정도로만 알려져 왔으나, 실제 그 모델이 된 서구 민주주의 정치에서 선거강령의 의미는 단순한 공약 차원을 넘어선다.

선거강령은 경제, 교육, 보건, 복지, 치안 등 각 정책 영역별 정책 방향과 핵심 정책이 제시되는 것은 물론이고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분석을 기반으로 포괄적인 비전 및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적 우선 순위까지 포함하는 그야말로 정당의 정치적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선거는 궁극적으로 이 선거강령을 두고 선택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선거 후에도 정치적인 구속력을 발휘한다. 간단히 말해 선거 때 입에 발린 소리하고 선거 뒤에 딴소리하는 것이 그만큼 통용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수당이나 집권당은 물론이고 소수당이나 야당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즉 반대당도 선거 때 제시되었던 선거강령을 기반으로 선거 후에 정책 비판과 대안 논리를 지속적으로 펼치며 더욱 보완하고 발전시킨다.

인물 중심, 이미지 중심, 상호 비방 중심의 선거 수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새로운 수준의 정치행위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 그 중 근대적 정당구조의 이점이 있는 민주노동당이야말로 이 점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선거강령 제시 과정을 통해서 추상적인 구호나 이념을 정책과 입법안으로 구체화해 대중에게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고, 또한 이를 포괄적인 비전과 방향으로 묶어냄으로써 실질적인 의회 활동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당내의 갈등과 논란 역시 구체적 대안을 중심으로 건설적으로 해소하고 이를 명문화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http://idea.borong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 블로그(http://idea.borong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 #종북주의 #총선 #심상정 #선거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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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지역및복지행정학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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