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선생님에게 드리는 글

'우리 말 살리기'에 평생을 바친 이오덕 선생님

등록 2008.02.01 09:31수정 2008.02.0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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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을 죽이는 이는 우리 자신이다

a  이오덕 선생

이오덕 선생 ⓒ 박도

이오덕 선생님!

선생님이 잠드신 부용산 산기슭 무덤에도 여태 흰 눈이 솜이불로 덮고 있을 테지요.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이 하도 속이 상해서 선생님에게 하소연이라도 할까 댁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는데 아무도 받지 않았습니다. 새삼 선생님이 이 세상 분이 아님에 매우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실은 수화기를 들 때 선생님이 이 세상 분이 아닌 줄 알면서도 번호를 눌렀고,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처럼 선생님 아드님 정우씨에게라도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전화를 받지를 않습니다. 그래 대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자 그동안 저에게 보내주신 여러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펼쳤습니다. 

우리는 지난 반만년의 역사에서 무서운 흉년도 많이 만났고, 끔찍한 전쟁도 수없이 치렀지만, 그때마다 그 어려움을 잘 이겨 내었다. 우리 모두의 삶과 얼이 담긴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앉아 외국 글 외국 역사를 하늘처럼 떠받들어 섬기면서 그 학식을 권위로 삼아 백성들을 겁주고, 백성들의 피땀을 짜내기만 하던 그 오랜 세월에서도, 일하면서 살던 우리 평민들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슬기롭게 우리 것 우리 마음을 지켜 자자손손 이어왔다. 우리를 안아 주면서 언제나 샘물 같은 힘이 솟아나게 하는 우리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그 말이 병들어 죽어 가고 있다. 이 일을 어찌하겠는가?


더구나 이렇게 말을 죽이고 있는 것이 이제는 바로 백성들 자신이고 우리 자신이다. 제 목숨 덩이를 스스로 내버리고 짓밟는 이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거의 모두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괴상한 겨레가 되어 가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어떤 흉년도 어떤 전쟁도, 그밖에 또 어떤 재난도 이보다 더 클 수 없다. 지금 나라살림이 다 거덜 났다고 모두 난리법석인데, 겨레말이 죽어가고 있는 일에 대면 이까짓 경제난국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난국이란 것도 알고 보면 사실은 우리가 오래 전부터 우리 것을 학대해 왔기 때문이다. 중국 글, 일본 글, 서양 글에 얼이 빠져서 우리 말 우리 글에는 등을 돌리고 멸시하는 이 더러운 종살이 버릇은, 우리 조상들이 지켜 온 모든 것을 버리고 짓밟는 풍조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남의 것 쳐다보면서 겉모양만 꾸며 보이고 허풍으로 살아 왔는데 우리 살림이 이 지경으로 결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이오덕 지음 <우리 말 살려 쓰기 둘> 아리랑

우리 아이들을 살리자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외국말과 외국 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민주고 통일이고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는 것이 좋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3년 뒤에 이루어질 것이 20년 뒤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민주와 통일의 바탕이 아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말이 아주 변질되면 그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잘못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도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끝장이다. 또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과 남의 글로써 창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창조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 이오덕 지음 <우리글 바로 쓰기> 한길사

지금 우리 아이들은 날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방안에 갇혀 책을 읽고 쓰고 외우는 것을 공부라고 하고 있다. 머리 속에 온갖 잡동사니 지식을 쑤셔 넣는 비참한 공부를 죽기 살기로 하느라고 그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고 비틀어지고 있다.

날마다 등에 지고 어깨에 메고 다니는 책은 아이들을 짓누르는 짐이 될 뿐 아니라 아이들을 절대로 지배하는 우상이 되었다. 이 우상은 아이들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아이들을 그 속에 가두어 놓고서 숨을 쉬지 못하게 하고, 앞을 못 보게 하고, 귀를 막아 온갖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못 듣게 한다. 이 우상은 또 온갖 병든 말, 잘못된 어른들의 말, 어려운 한자말, 서양말, 일본말 투성이로 되어 있다.

- 이오덕 지음 <어린이책 이야기> 소년한길

눈에 띄는 몇 대목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렇게 우려하시던 일들이 이제는 눈앞에 현실로 가로 막고 있습니다. 지난해 겨울, 제17대 대통령에 그동안 바르게 살아오지 않는 이가 당선이 되었습니다.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백성들의 뜻으로 당선되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이 들으시면 기절할 일이 쏟아졌습니다. 일주일 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분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영어 이외의 일반과목도 영어로 수업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하더니, 어제는 대통령 당선인마저도 나서서 “영어를 잘하는 나라가 더 잘 산다” 논리로, 새 정부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새 영어교육 정책 비판 여론을 몰아쳤습니다.

a  이오덕 시비

이오덕 시비 ⓒ 박도


자존심마저 허물어지는 참담한 현실

a  이오덕 묘비에서 아들 정우(왼쪽)씨와 함께.

이오덕 묘비에서 아들 정우(왼쪽)씨와 함께. ⓒ 박도

예사 일이 아닙니다. 이는 후보 시절 방명록에 맞춤법도 틀리게 글을 썼다가 한 작가의 지적으로 망신을 당하니까 그에 대한 보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날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 맞춤법이 어렵다고 소리 나는 대로 쓰라는 지시에 어용학자들이 그 말을 받들어 그렇게 시행한 웃지 못 할 희극도 있었지요. 이는 그보다 더 무서운 발상입니다.

우리겨레의 혼을 변질시키는,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정신 나간 짓입니다. 양식있는 미국인조차도 우리를 더욱 업신여기고 비웃을 일입니다.

이오덕 선생님!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면 제게 이런 말씀을 들려주실 것 같습니다.

“이봐, 박 선생. 우리 두 사람이라도 죽창을 들고 서울 삼청동 인수위지 뭔지 쫓아가서 그들에게 단단히 알아듣도록 일러주고, 그래도 우리 말을 깨닫지 못하거든 그들을 죽창으로 요절을 내고 우리 발로 교도소로 찾아가세.”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는 <마지막 수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령 어떤 국민이 노예의 신분이 되더라도 자기 나라의 국어를 견실하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자기가 갇힌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어를 우리들은 소중하게 지키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a  이오덕 선생 서명

이오덕 선생 서명 ⓒ 박도

이런 말들이 새 정부 당국자에게 제대로 들리겠습니까?  5년을 기다리기에는 세월이 너무 깁니다. 제 모국어를 제치고 영어에 골병들 우리 아이들이 매우 불쌍합니다. 왜 우리 아이들을 불행하게 길러야만 합니까?

우리 사회에 이미 도덕과 양심은 무너졌고, 이제 우리 자존심마저 허물어지는 이 참담한 현실을 어찌 헤쳐 나가야 합니까? 

이오덕 선생님, 꿈에서나마 제가 해야 할 일을 들려주십시오.
#우리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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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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