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를 산에 보낼 수 없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70] 조선 사대부들과 성리학

등록 2008.07.08 16:22수정 2008.07.0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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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홍화문,  창경궁 정문이다.

홍화문, 창경궁 정문이다. ⓒ 이정근



도성에는 여러 곳에 궁이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의 건국 혼이 서려 있는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지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폐허나 다름없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피해 의주로 몽진했던 선조가 돌아와 성종의 형 월산대군 사저에 거처하며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던 덕수궁도 인목대비가 승하한 이후 을씨년스럽다.


광해군이 야심차게 건설했던 인경궁과 경희궁도 인조 즉위 후 초라해졌다.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인조의 집터에 궁을 지었기 때문이다. 동궐이라 불리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한 울타리에 있지만 전란을 맞이하여 의기소침해 있다. 그런데 임금이 없는 궁이면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며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 있다. 남별궁이다.

남별궁은 명나라의 통혼 강요에 태종 이방원이 그의 둘째 딸 경정궁주를 조준의 아들 조대림에게 부랴부랴 시집보내면서 하사한 집이다. 이때부터 소공동의 유래가 된 소공주댁이라 불렸다. 선조의 아들 의안군의 신궁이 되면서부터 남별궁이라 불린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지휘부를 설치하면서 힘의 근원이 되었다.

a 남별궁.  남별궁터에 원구단이 지어졌고 오늘날에는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남별궁. 남별궁터에 원구단이 지어졌고 오늘날에는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 이정근



바로 이곳에 오목도가 똬리를 틀고 있다. 대개의 사신이 모화관에 머물며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갔으나 칙사급 사신은 남별궁에 묵었다. 그리고 조선을 호령했고 임금을 질책했다.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것이 국왕이다. 그 군왕에게 추위를 타게 하는 것이 황제의 말이다. 황제의 말이 남별궁에서 나왔다. 사신의 입을 통해서다. 이 때문에 남별궁은 옥상옥(屋上屋)이었고 청나라의 조선 총독부인 셈이었다.

인조 임금이 있는 창경궁은 썰렁하지만 남별궁은 문턱이 닳고 불야성을 이루었다. 특히 땅거미가 짙어지고 밤이 이슥해지면 더욱 극성을 부렸다. 북촌에 살고 있는 고관대작들이 보내는 선물 수레가 광통교를 메웠고 애첩과 기생을 보내는 가마가 줄을 이었다. 심양에 인질로 잡혀있는 가족을 빼내오고 승차하기 위한 뇌물공세와 성상납이다.


승지 박노가 남별궁을 찾았다. 조선 여자를 끼고 느긋하게 밤을 보낸 오목도가 박노를 맞이했다.

"영의정 최명길과 두 판서를 파직했습니다."
"최명길의 공헌이 적지 않았는데 파직까지는 너무한 것 아니오?"


오목도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용가치가 떨어진 최명길을 내치라고 닦달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태도를 바꿨다. 인사치레성이지만 청나라 사람들 특유의 이중성이다.

"조선의 의지를 보여드린 것입니다."
"알겠소. 황제에게 전하리다."

오목도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이보시오. 승지! 내가 기분이 좋단 말이오. 난 이렇게 기분이 좋은 날이면 산에 올라야 직성이 풀리오. 조선의 명산 금강산이 있다 들었소. 허나 세자와 함께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으니 금강산은 다음에 오르기로 하고 오늘은 백악산과 남산을 오르고 싶소. 준비하시오."

a 백악산.  백악산 표지석.

백악산. 백악산 표지석. ⓒ 이정근


오목도의 말투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오목도의 말을 듣는 순간 박노의 얼굴빛이 까맣게 변했다. 백악과 남산은 조선 왕조가 신성시 하는 산이다. 특히 백악은 조선 오악(五岳)중의 하나다. 오목도의 요청을 받은 조정은 경악했다. 대소신료들의 격론이 벌어졌다.

"한양을 신생 조선국 도읍지로 정한 정도전은 백악을 주산으로 삼고 목멱을 안산 삼아 경복궁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백악산과 목멱산을 축으로 성곽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하였습니다. 오목도가 백악과 목멱에 오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그가 백악에 오르겠다는 데에는 또 다른 저의가 있는 것 같으니 허용하지 마소서."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졌던 산이 안보상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목도의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없지를 않습니까?"

"태조 대왕께서는 백악의 성황신에게 녹(祿)을 주었고 태종 대왕께서는 삼각산 신위를 백악사(白岳祠)에 옮겨 백악의 신과 짝을 지워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세종대왕께서 병환에 시달릴 때 백악과 목멱산에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성산에 오목도가 오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관념에 휩싸이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신위를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갔고 백성들은 신주를 등에 지고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켜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청나라 군대의 말발굽에 조선 강토가 짓밟혔고 백성들이 도륙되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성산은 없습니다."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 튀어나왔다. 신위와 신주를 부정하는 현실론이다. 고려 말, 혼란기에 이 땅에 유입된 성리학은 들불처럼 번졌다. 고려조에 회의를 느끼던 진보적인 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들이 일단의 무장들과 연대하여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건국하면서 자연스럽게 국교로 정착했다. 이 때문에 유교는 종교이기 이전에 학문이다.

신생국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신봉했다. 여타의 종교가 유일신을 강조하지만 유교는 강요하지 않았다. 충과 효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자기성찰을 요구했다. 사대부들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관계의 핵심은 신(信)이라 설정하고 도덕에 천착했으며 우주로 지평을 넓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완성하였다.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받들었다. 명나라의 힘이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유교의 종주국이었기 때문에 더욱 존경했다. 사대부들은 인간의 본성을 깨우쳐 주는 성리학에 매료됐다. 지금 현재는 청나라의 힘에 눌려있지만 언젠가는 명나라가 일어나고 더불어 조선도 힘을 받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성리학은 조선사대부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힘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청나라를 야만족으로 인식했다. 만주벌판을  말 타고 내달리는 무식한 종족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를 붉은 돼지로 폄하했다. 그러한 돼지 같은 사람들이 신령한 산에 오르겠다 하니 억장이 무너졌다. 이것은 주화와 척화라고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였다.

그러한 사대부들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란을 겪고 임금이 이민족에게 항복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의식에 변화가 온 것이다. 이후 실학을 중시하는 학자들이 등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칙사의 청을 거절하여 더 큰 화를 자초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다른 대안이 없지를 않습니까?"

오목도의 청을 물리칠 수 없다는 신하들과 어떠한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신하들이 격론을 벌였다. 하지만 오목도의 청을 받아들이자는 목소리는 작았고 거절하자는 중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배청파와 친청파 모두의 저변에 깔려있는 성리학이 사대부들을 하나로 묶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다.

인조의 고민이 깊어졌다. 이 때였다. 병조참의 권징선이 의견을 내놓았다.

"황제의 명을 거역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오목도는 우리나라에 온 사신입니다. 사신의 개인적인 청을 물리친다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오! 그대의 의견이 탁견이다. 그 말이 옳다."

인조가 무릎을 쳤다. 아주 간단한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제야 조정대신들과 임금이 청나라의 미몽에서 깨어난 것이다. 청나라라 하면 게나 걸이나 먼저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가는 자기 비하에서 탈출한 것이다.

a 백악산.  백악산 정상에 있는 바위. 조선시대 이곳에서 제를 올렸다.

백악산. 백악산 정상에 있는 바위. 조선시대 이곳에서 제를 올렸다. ⓒ 이정근



방침을 정리한 인조가 박노에게 조정의 듯을 전하라 명했다. 남별궁을 다시 찾은 박노와 오목도가 마주 앉았다. 박노의 얼굴에 결기가 흐르고 비장감마저 배어 있었다. 

"소신이 심양에 있을 때 황제와 여러 장수들이 출정할 때면 성황신에 제를 올리고 전장으로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터가 무엇입니까? 적을 베고 승리하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만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전장입니다. 불안한 마음을 씻고 무운장구를 비는 마음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조선은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으면 백악산 성황신에게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풍습입니다. 청나라에서도 우리가 흉년이 들어 군량미를 보낼 수 없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우제를 지내고 비가 오면 다행이지만 설사 비가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제를 올린 것으로 모든 신민이 위안을 삼기 때문입니다. 백악과 목멱은 이러한 성산이니만큼 살펴주십시오."  

열변이었다.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았고 오목도의 비위를 거스릴 만큼 경솔하지도 않았다. 심양에서 목격했던 청나라 민족 정서를 거론하며 설득했다.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고 초원을 떠돌아야 하는 유목민 여진족은 일정한 산을 정하지 않고 자신의 집근처에 돌무더기를 쌓아올린 성황당에 출타할 때면 제를 올렸다. 그 모습을 상기시킨 것이다.

박노의 얘기를 들은 오목도는 아찔했다. 자신이 백악산에 오른 후, 가뭄이라도 들어 군량미 확보에 차질이 생긴다면 황제의 진노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오히려 박노가 고맙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속내를 드러내면 체신이 안 선다.

"그 산이 그렇게도 신성한 산이오? 그렇다면 내 오르지 않으리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산이 거기에 있기에 산에 오른다고 하지를 않소? 나도 어젯밤에 좋은 산이 있기에 산을 너무 지나치게 오르다보니 하체가 풀렸소. 그렇지 않아도 산행을 취소하려던 참이었소. 하하하."

오목도의 백악산 산행은 싱겁게 끝났다. 하지만 오목도의 백악산 등정 계획을 미리 탐지하고 도성에서 제일 옹녀스럽다는 서린방 기생 송월이를 오목도의 침소에 밀어 넣은 계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
#백악산 #목멱산 #경복궁 #인경궁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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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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