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말랑말랑한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시와 사랑, 그것은 내 영혼을 시험하는 일

등록 2009.05.11 09:42수정 2009.05.1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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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녹동항에서     
소록도로 가는 여객선이
짧은 여정을 마치고 
속력을 줄이며 접안을 시도하자   
뱃머리에 달린 폐타이어가     
눈 질근 감고
형체도 없이 온몸을 찌그러뜨리며
마치 보채는 아기 달래듯
깊은 모성으로 
엄청난 가속의 충격을
일순 잠재워버린다.
   
잘나고 모난 것들끼리
서로 부딪혀 박살나지 않도록
이미 용도폐기 되어 
뼛속까지 말랑말랑해진 것이    
누더기 같은 어깨를 들이미는 사이
나 어린 처녀 서넛이 
우주에서 막 당도한 햇살 같은
환한 웃음을 입가에 달고
종종걸음으로 배에서 내려
사뿐히 섬에 가 닿고 있었다. 
    
낡은 시간을 깁는 
아름다운 폐인이 되고 싶었다.  

- 졸시, '아름다운 폐인'

오랜만에 시를 한 편 썼습니다. 이곳 연수원에 들어오는 바람에 잠깐 시를 잊고 살았는데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영문판으로 읽다가 마음에 바람이 일듯 갑자기 시가 그리워졌습니다. 그렇다고 시가 금방 써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다가 지우기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알량한 몇 줄의 시구를 얻었을 뿐입니다.

시를 쓰는 날은 우울한 날입니다. 한 순간의 광휘만으로 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제게 찾아온 시를 잘 대접하지 못하고 그냥 헛되이 보내는 날이 허다합니다. 이곳저곳 손대다가 누더기가 되어버린 시를 붙잡고 비통해 하는 날도 많습니다. 이때 영혼의 초라함을 견디지 못하면 결국은 시 쓰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시 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제겐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내 영혼을 시험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개는 그 시험에서 쓰디쓴 고배를 마시는 날이 많지요. 그런 날이면 내 몸과 영혼을 빨아서 햇살에 널어 말렸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집니다. 누군가를 연애하는 일도 그렇거니와, 교사로서 한 아이를 사랑하는 일도 저에겐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고 사랑하는 일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건너가기 전에 그들이 먼저 저를 찾아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혼을 시험하는 그 두 가지 일로 인해 조금씩이나마 사람의 꼴을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사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고흥 녹동항을 떠난 배가 소록도에 닿으면서 목격한 일련의 사건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저에겐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시로 대신하겠습니다. 다만, 그 사건이 있기 이전과 이후의 제 삶이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령, 언젠가 한 아이에 대한 사랑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된다면 아마도 소록도에서의 기억은 사랑을 지속하는 쪽으로 저를 이끌지도 모르겠습니다.     
 
곧 스승의 날이 돌아옵니다. 스승의 날이 마냥 즐겁지만 않은 것은 스승이라는 이름값 때문이겠지요. 솔직히 저는 스승이란 호칭보다는 교사나 선생님이란 호칭을 더 좋아합니다. 스승보다는 선생님이라는 말이 더 다정하고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스승이 완성형이라면 교사나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배움을 완성해가는 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를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다가 지우면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해가듯이 아이들과의 만남도 그런 식으로 깊어갈 것을 믿고 싶습니다. 또한, 지금은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우주에서 막 당도한 햇살 같은' 아이들을 위해 '뼛속까지 말랑말랑해질 수 있는' 그런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스승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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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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