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그녀를 제물로 바칠 수 없다

[소설] 바다의 잔이 넘칠 때- 제4회

등록 2009.08.01 12:41수정 2009.08.01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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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바 다 그리고 바다

다 그리고 바다 ⓒ 송유미

▲ 바 다 그리고 바다 ⓒ 송유미

 
해풍은 살랑살랑 불었다. 잠시도 잠들지 못하는 파도는 철썩 철썩 선미의 빰을 후려쳤다. 새하얀 포말이 부서지고 다시 부서지길 반복했다. 간간이 이는 하얀 물보라가 브리지 창에 후두둑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뭉게구름 사이로 태양이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있었다. 갑판은 조용했다. 모두 선실로 들어가 버렸는가. 쥐새끼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이 갑판을 돌아 다녔다. 마스트 꼭대기에 날개를 접고 앉은 철새들도 조는 듯 조용했다. 
 
도수철은 줄담배를 피워댔으나 갑갑한 속은 달래지지 않았다. 담배를 끊어야지 하면서도 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또 줄담배를 태워대는 것이다. 브리지 바닥에는 아무렇게나 끈 꽁초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바다에는 어군이 없다. 이런 식으로 어군이 제 마음대로 이동한다면 더 이상 고깃배를 탈 수 없는 것이다. 도수철은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 깊은  용궁속으로 헤엄쳐 들어가서 용왕에게 내 간을 떼어가고 고기 좀 많이 풀어놔달라고 빌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다. 
 
바람은 마술피리 같이 잔잔한 바다에 파도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대로 폭풍이 올 것인가. 폭풍전야 같이 조용했던 바다가 허옇게 눈을 까뒤집기 시작했다. 그래, 기다리고 기다리던 절호의 기회가 이제야 또 다가 오는가… 도수철은 가슴 속에서 쿵쿵 빨래 방망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큰 마음을 먹고 나니 이제 무궁화호도 겁 안났다. 북한 경비정도 겁이 안 났다. 이판사판이다, 뭐 죽기 아니면 살기밖에 더 하겠나?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않다. 무궁화호에게 걸리면 적어도 삼 개월 동안 출항 금지에 면허 취소가 된다. 거기다 벌금 4-5 천은 물어야 할 것이다.
 
자칫 북한 경비정에게 나포되면 영영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른다. 아니다. 나포돼도 몇 개월 잡아 두었다가 골치 아파서라도 그냥 남한 측에 넘길 것이다...  아니다...북한 경비정에 끌려가서 풀려나온 동료 말로는 말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혈혈단신 나는 상관이 없다. 그래 뭐... 뱃놈이 고기 잡겠다는 데 그게 무슨 큰 죄인가…
 
a 바 다

다 ⓒ 송유미

▲ 바 다 ⓒ 송유미

우르릉 쾅쾅 마른 천둥 소리와 함께 갑판에 들이 닥친 커다란 파도에 맞아 나이론 밧줄로 대충 동여서 메어둔 고기상자들이 힘없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덜컹덜컹 선실문들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선실에서 누구 하나 내다 보는 놈이 없었다. 배의 엔진 소리도 불규칙적으로 쿵쾅거렸다. 크고 작은 파도가 배를 깔아뭉갤 듯이 성이 난 짐승처럼 우르렁 거렸다. 그러나 배는 용맹전진하게 앞으로 전진했다.
 
그래, 무조건 전진하는 거다. 그러면서도 아랫도리가 경미하게 떨렸다. 도수철은 초조한 눈빛으로 레이더의 전원을 켰다. 레이더의 안테나가 희뿌연 잡음을 끌며 돌아갔다. 레이더 화면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강령연안의 경계선이 선명하게 돋아났다. 해주항에 정박해 있는 배의 불빛도 번쩍거리며 나타났다. 
 
GPS(선위측정계기)에 나타나는 배의 위치를, 어장도에 그려 넣었다. 향해 일지에 배의 위치를 가상으로 옮겨 기입했다. 만에 하나 경비정한테 걸리면 오리발을 내밀 생각이다. 강령연안으로 그물을 끌고 오는 탄지지간(彈指之間) 기분이 묘하게 붕 떴다. 이곳은 황금어장이다. 사실 까 놓고 말해 한두 번 도둑처럼 3. 8 선 넘어 고기 잡은 것도 아니다. 다만 기억에서 지워버린 탓에 그때마다 쿵쿵 가슴이 오그라드는 공포를 버릴 수 없을 뿐이다.
 
까짓껏 인천 연안에서 두 달 동안 고생해도 올릴 수 없는 어획량을, 목숨을 걸면 열 배 이상은 올릴 수 있으니 뱃놈이라면 누구나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치명적인 유혹이다. 그래, 이번만이다. 이번에 한 탕을 해서 인천 시내에서 횟집이라도 차릴 계획이다. 횟집을 차리면 영숙을 어떻게 구워 삶아서라도 데리고 와서 살 생각이다.
 
그럼 영숙이도 고달픈 물장사 그만 둘 수 있다. 영숙이도 겉으로 웃지만, 어디 그게 여자의 행복인가. 영숙이와 결혼하기 위해서라도 횟집을 차려야 한다. 그럼 헤어질 일 없이 하루종일 얼굴을 맞대며 살 것이다. 끼 많은 마누라처럼 영숙이가 바람을 피울 리도 없다. 티켓다방 레지치고는, 영숙은 정숙하려고 노력하는 여자다. 인천항을 들락이는 뱃놈치고 사실 영숙이에게 눈독을 들이지 않는 놈이 없다.
 
그런데도 누가 영숙을 정복했다는 소문은 없다. 횟집을 차려 영숙과 살림을 차려, 마누라에게 당한 한 풀고 행복해 지리라. 도수철은 영숙만 생각만 하면 힘이 절로 솟구쳤다. 하지만 정작 이런 마음을 영숙은 알 리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 기회를 봐서 영숙에게 영화구경가자고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혼자 상상하고 그리워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온 영숙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철벅철벅 물소리를 내며 끝 자루그물이 원치에 끌려 갑판으로 올라왔다. 촘촘한 끝 자루 그물 속에는 쥐치, 야리카, 뱅어, 돔 등이 뒤섞여 있었다. 갑판에 풀어 놓은 어군은 갑판이 비좁다는 듯이 퍼들거렸다. 여기저기서 신명 겨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부들은 갑판으로 들이치는 큰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잽싸게 어군을 처리해 냉동실에 넣었다. 모두들 흥분으로 말문이 막혔다. 얼핏 계산해도 돔이 육십 상자 쯤 될 것 같았다. 쥐치, 뱅어, 야리카 합해 스물 상자 정도 되어 보였다. 돔은 상당히 씨알이 굵었다.
 
 인천 공동어시장에서의 돔의 가격은 상자 당 이십 오만원이다. 두 시간 정도 예망해서 이 정도이다. 인천수산업과의 6 : 4……. 주식과 부식비, 기름 값과 어구재료비, 어부들에게 돌아가는 수당을 제외하더라도 , 이건 횡재다. 횡재 .....  여느 선장처럼 어부들의 수당을 빼돌릴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래, 북한 경비정이고 나포고 신경 쓸 것 없다. 이 폭풍의 바다에 경비 나오는 놈이 미친 놈이다. 도수철은 폭풍의 바다에서 집요하게 그물을 투승했다. 도수철의 배는 일엽편주처럼 터엉터엉 파도를 들이받으며 그물을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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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 송유미

▲ 바 다 ⓒ 송유미

"도선장 나오라 오바 ! 도선장 ! 나오라 오바 !"
 
무선 통신기에서 흘러나온 맹 석출 선장의 목소리가 길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수철은 맹석출의 교신을 묵살했다. 괜히 폰을 잡았다가는, 인천 항 티켓 다방 아가씨들 돈이면 거지 앞에서도 옷 벗는다, 우리 영숙이는 그치들과 다르다……등등 헛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해서다. 
 
사실 맹 석출 선장은 인천항 뿐만 아니라 부산항 목포항 등 전국 곳곳에서 가장 실적 높은 어획고를 자랑하는 능력 있는 선장이다. 그러면서도 어부들의 수당을 슬쩍 빼돌려 얻는 부수입도 여느 선장보다 월등했다. 뿐만 아니다. 사생활도 숨기는 것이 없어서 좁은 인천항에서 맹 석출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 듣는다.
 
그래서일까. 상대에게도 사생활 보호 따위의 개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목욕탕에함께 들어왔으니 뭐 가릴 거 있냐는 식이다. 그래서 더러 민망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도수철은 일말 같은 남자로서 맹 석출을 동정치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제 마누라와 피 한방울 한 섞인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복수의 제물로 삼는 짓거리에 분노치 않을 수 없었다. 그 제물의 리스트에 영숙이 올라 있는 것이다. 도수철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심정이었다. 
 
'안된다. 하늘이 둘로 쪼개져도, 절대 그녀가 맹선장 제물이 되면 안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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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 송유미

▲ 바 다 ⓒ 송유미

 

덧붙이는 글 | 월간, '법연원'에도 송고 하였음.

2009.08.01 12:41ⓒ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월간, '법연원'에도 송고 하였음.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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