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5월 터키 수상 술리만 데미렐에게 한 남성이 덤벼들어 뺨을 한 대 후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술리만 수상은 코뼈가 주저앉았다. 범인은 34살의 '부랄 온셀'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엄중한 심문 끝에 법정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당시 터키 검찰은 그에게 헌법질서전복기도죄를 적용했다. 바꿔 말하면 '국가원수모독죄'다.
하지만 그는 검찰의 사형 구형에도 지지 않았다. 재판이 시작된 법정에서 재판장이 "당신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내 직업은 혁명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랄 온셀의 대답에 법정은 일순간에 웃음바다가 됐다. 뒤를 이어 그는 "내가 술리만의 뺨을 때린 것은 인민들이 기존 질서에 저항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 제스처"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목 없는 대통령' 그림에 언론사 편집국 강제 폐쇄
부랄 온셀처럼 국가원수모독죄로 큰 벌을 받은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1985년 5월 체코 경찰은 대통령 겸 당서기장인 구스타프 후사크를 '멍청한 거위'로 묘사해 놓은 만화를 소지한 반체제 인사 4명을 구속했다.
'77헌장' 그룹 회원이라는 스타니스와포 피타스 등 4명은 대통령의 이름에 빗대 그를 능력없는 지도자로 풍자했다. 구스타프는 체코어로 '거위'를 뜻한다.
1991년 아르헨티나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져 정부와 언론의 정면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정부에 비판적인 월간지 <리네아>는 머리가 떨어져 나간 채 몸통만 있는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의 풍자화를 3월호 표지에 실었다가 경찰의 급습을 받았다. 이 만평의 제목은 '정권 공백'이었다.
<리네아> 편집국에 쳐들어간 경찰은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사무실을 강압적으로 폐쇄해 버렸다. 물론 죄명은 국가원수모독죄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거의 모든 언론이 정부의 언론탄압을 비난하고 나서 메넴 대통령은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한국에서도 민추협 부의장을 지낸 조윤형씨가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된 바 있다. 1966년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이 폭로되자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배후로 지목하며 '밀수 왕초'라고 공격했다. 당시 검찰은 조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기소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법정구속됐다. 구속 당시 그는 현직 국회의원 신분이었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사죄하시오"라고 고함을 친 죄로 검찰이 민주당 백원우 의원을 벌금 300만 원에 약식기소했다. 죄목은 '장례식 방해죄'다.
하지만 백 의원에게 적용된 죄목은 사실상 국가원수모독죄로 보인다. 이는 이른바 '국민의병단' 소속 전아무개(49)씨가 백 의원을 '특수공무집행 방해 및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데서도 드러난다. 공개된 장소에서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백 의원 행동의 옳고 그름은 일단 접어두자. 하지만 전씨의 고발장을 받아쥐고 6개월을 고민한 검찰이 내놓은 결과가 고작 '장례식 방해죄'라는 것은 기막힌 일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을 평생 스승으로 모셔온 백 의원이 그의 장례식을 고의로 방해했다는 주장을 이해할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무슨 명목으로든 백 의원을 처벌하려고 애쓰는 검찰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국가원수모독죄(구형법 제102조의 2, 제1항)는 한국 형법에서 지난 1988년 지워졌다. 처벌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어 위헌 시비가 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 의원 사건을 처리하는 검찰의 태도는 사라진 국가원수모독죄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백 의원은 검찰의 약식기소에 맞서 "정식재판을 청구하겠다"고 한다. 시시비비는 법정에서 가려질 일이지만, 국가원수모독죄와 같은 '헌 칼'을 뽑아든 검찰의 역주행은 누군가 제동을 걸어야 한다.
2009.12.24 16:11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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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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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 한 대에 사형, 고함 한 번에 30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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