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그리워지는 재미없는 천국, 루체른

[바깽이의 스위스·이탈리아 여행기①]

등록 2010.02.18 21:28수정 2010.02.1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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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무제크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루체른 호수

무제크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루체른 호수 ⓒ 박경


로이스 강변을 수놓은 예쁜 호텔들, 푸른 강가에 눈처럼 떠다니는 살찐 고니들, 오래고 오랜 나무향기를 내뿜는 루체른(Luzern)의 상징 카펠 교,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무제크 성벽, 호젓하고 조용한 한여름의 뒷골목….

여행에서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난 지금, 루체른을 떠올려 본다. 모든 지나간 여행은 책갈피 꽃잎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고백해야겠다. 만일 또 한 번 스위스를 찾는다면,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 1위가 루체른이라고.


재미있는 지옥이 그리워지는 재미없는 천국

무제크 성벽 끝자락에 위치한 호텔은 쾌적했다. 보송보송한 리넨 시트는, 전날 스위스에 도착해 아직 시차적응을 하지 못한 여행자에게 낮잠을 유혹할 만큼 충분히 포근했다.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시계도 보았다. 프레스코화가 그대로 남아 있는 옛 시가지를 둘러보기도 했다.

슬슬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한낮에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같은 지루함이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이 든 것이다. 이렇게 군더더기 없고 조용한 관광도시는 처음이다. 문제는 바로 그것.

뒷골목에는 관광객이 떼를 지어 순간순간 왁자하게 몰려다니긴 해도 그렇게 지나가 버리면 그만, 사람이 사는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느낌이다. 물론 아이스크림 가게는 북적이고 장사치들은 자리를 차고 앉아 있다. 하지만 흥정하는 소리도 싸우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아니, 흥정을 할 것 같지도 싸움이란 걸 할 것 같지도 않다.

일요일 여름 낮이라서 그런 걸까? 마치 침묵과 고요가 안개처럼 가라앉은 느낌이랄까. 오래된 도시의 기운에 휘감겨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소심하게 숨죽인 듯하다. 나는 뒷골목의 탑시계를 한참이나 올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시계가 멈춰 버린 건 아닌가 싶어서. 우리나라는 재미있는 지옥이라더니, 여기는 그야말로 재미없는 천국이다. 너무 조용하고 깨끗해서 지루한 도시 루체른. 이렇듯 루체른의 재미없는 첫인상에 쐐기를 박은 것은 바로 음식이었다.
  
살인적인 스위스 물가를 실감하다


a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 카펠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 카펠교 ⓒ 박경


우리가 찾는 식당은 문도 열지 않았다. 아침도 빵을 먹고, 점심도 루체른 역에서 빵과 소시지로 때웠다. 그렇다고 해서 값이 싸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스위스의 물가는 익히 들은 대로 살인적이다. 역 안의 노점상에서 세 사람 분의 간단한 빵과 음료수, 소시지를 사는 데 우리 돈으로 3만 원이나 들었다. 음식다운 음식이 간절히 그리운 늦은 오후였다.

강변에 야외 테이블이 마련된 그럴듯한 식당에 우리 가족은 자리를 잡았다. 눈길이 바빠지는 순간이다. 옆 테이블 손님들은 대체 무얼 먹고 있나. 대부분 스테이크다. 스위스 고기가 맛있다고는 하지만 전혀 당기지 않는다. 뭔가 입맛에 맞는 걸 좀 먹고 싶은데, 입맛에 맞는 걸 찾자니 모험을 피하고, 이름이 익숙한 것을 찾게 된다. 리조토 2인분과 펜네를 시켰다. 93CHF나 한다(우리 돈 10만 원 가량. 스위스는 유럽 연합에 가입하지 않아 스위스 프랑이라는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한다).


제법 오래도록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느린 것에 익숙한 것인지 음식이 목적이 아닌 것인지 기다리는 사람도 서빙하는 사람도 느긋해 보이기 짝이 없다.

a  보기만 해도 입맛 떨어지는 루체른의 리조토

보기만 해도 입맛 떨어지는 루체른의 리조토 ⓒ 박경


드디어 음식이 나왔을 때 옆에 앉은 서양 사람들이 힐끗 본다. 그 표정은 마치 뭐랄까, 저런 메뉴도 있었네?, 뭐 그 정도로 느껴졌다. 정체 모를 소스에 버무려진 노르댕댕하기만 한 밥알이 식감을 자극하는 건 아니었다. 일단 양은 푸짐하고 1인분에 3만 원이 넘는 음식이라는 데에 믿음을 걸어 본다. 게다가 리조토의 본토가 바로 이웃하고 있는 이탈리아인데 설마, 하면서 한 입 먹어보는 순간, 도끼에 발등 찍힌다. 방금 전 서양 사람의 그 표정은 바로, 저런 개밥을 왜 먹지?, 이거였구나.

반복된 여행을 통해서 실패에 연연해하는 촌스러움을 제법 극복했다고 자신했었는데, 이게 또 쉽지를 않다. 이렇게 환율 억울한 때에 이렇게 물가 높은 곳은 또 처음이란 말이다.
낯선 곳에서 먹는 음식일망정, 우아하게 자신 있게 가족 수대로 3인분을 시킨 것도 아까워 죽겠다. 그 맛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3분의 1이라도 먹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본전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스위스에 있는 동안 내 방식대로의 환율 계산으로 스스로를 볶아 대기 시작했다. 10만 원이 넘는 돈이면 서울에서 한우고기 배터지게 먹을 수 있는데, 햄버거 하나에 8천 원이라니 서울보다 세배도 넘네, 저 돈이면 서울에서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구시렁 구시렁….
  
꽉 짜여진 여행일정은 생각만 해도 답답해

a  로이스 강 저 멀리 카펠교가 보인다

로이스 강 저 멀리 카펠교가 보인다 ⓒ 박경


이렇듯 루체른은 나에게, 지난밤 도착해서 잠만 자고 떠나온 취리히의 길고 깊은 아침 종소리만큼의 감동도 주지 못했다. 루체른이라는 도시는, 필라투스나 티틀리스·리기 산을 갈 사람, 길고 긴 여행 도중에 하루쯤 휴식이 필요한 사람, 서로에게 열중하느라 눈이 멀어 버린 신혼부부, 세상의 모든 도시를 돌고 돌아 가야할 곳이라고는 오로지 루체른만 남겨둔 희망 없는 여행자, 혹시 남산이나 어린이 대공원 팔각정 대신 주제넘게 카펠 교 팔각정에서 20년 후에 만날 것을 약속했던 철없던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냥 지나쳐 가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 스위스에 가면 꼭 방문해야 할 아름다운 도시로 루체른을 꼽는 여행자들이 제법 많았다. 어쩌면 나의 기대나 일정과 루체른이 맞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슬그머니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이번 여행이 지루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루체른에서 인터라켄, 몽트뢰를 거쳐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넘어가서 피렌체 로마 를 둘러볼 예정이다. 호텔이나 호스텔, 롯지, 민박이 차질 없이 다 예약이 되어 있고, 스위스의 모든 교통수단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패스도 이미 서울에서 구입해 왔다. 먹어야 할 음식의 리스트도 대충은 머릿속에 있고(별로 잘 지켜지진 않지만) 보아야 할 것들도 이미 다 정해져 있고, 이탈리아에서 이틀쯤은 투어도 신청해 놓았다.

아, 생각만 해도 맥 빠지고 시시하다. 벌써 여행 다 해버린 기분이다. 이 꽉 짜여진 여행 일정은 언제나 그렇듯이, 예측할 수 없고 언제 집으로 돌아갈 지 기약 없는 여행을 꿈꾸게 만든다. 자유여행도 이쯤 되면 패키지여행이랑 뭐가 다르냐고 나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초라니 입방정이 씨가 된 걸까. 다음날, 우리의 여행일정에 심각한 균열이 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도 순전히 나 때문에.

덧붙이는 글 | 2009년 8월, 2주 동안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환율도 그 당시 기준입니다


덧붙이는 글 2009년 8월, 2주 동안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환율도 그 당시 기준입니다
#스위스 #루체른 #카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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