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化)' 씻어내며 우리 말 살리기 (66) 약체화

[우리 말에 마음쓰기 884] '세습화되다'와 '물려주다'

등록 2010.03.23 13:27수정 2010.03.23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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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세습화되다

 

.. 다윗은 이스라엘의 군주정체를 확립시켰으며, 솔로몬에 와서 군주체제는 세습화되었읍니다 ..  <지학순-정의가 강물처럼>(형성사,1983) 51쪽

 

 "이스라엘의 군주정체"는 "이스라엘 군주정체"로 다듬고, '확립(確立)시켰으며'는 '튼튼히 다졌으며'나 '기틀을 닦았으며'나 '세워 놓았으며'로 다듬어 줍니다.

 

 ┌ 세습화 : x

 ├ 세습(世襲) : 한 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그 자손들이 대대로 물려받는 일

 │   - 세습 왕조 / 권력의 세습

 │

 ├ 군주체제는 세습화되었읍니다

 │→ 군주체제는 대물림되었습니다

 │→ 군주체제는 이어졌습니다

 └ …

 

무엇인가를 갖고 있던 사람은 물려줍니다.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던 사람은 물려받습니다. 물려주거나 물려받는 모습을 놓고 한자말로는 '세습'이라고 일컫습니다. 우리네 지난날을 돌아본다면 권력자는 권력자대로 권력을 물려주고 물려받았습니다. 돈 많은 이들은 돈을 물려주고 물려받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을 물려주고 물려받았습니다. 오늘날 북녘은 '세습 정권'이라고 합니다. 권력을 쥔 아버지가 당신 아이한테 권력을 물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말로 한다면 '대물림 정권'입니다.

 

 ┌ 군주체제를 딸아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 군주체제를 아이들한테 이어주었습니다

 ├ 군주체제를 고스란히 물려주었습니다

 ├ 군주체제를 꾸준히 이어나갔습니다

 └ …

 

보기글에서는 한자말 '세습'을 살리면서 "세습이 되었습니다"로 손질해도 어울립니다. 하긴. 그렇지요. '-化'를 붙일 까닭이 없잖아요. '세습'이라는 낱말도 '물려받다'를 한자로 뒤집어씌운 만큼, 있는 그대로 '물려받다'로 풀어내거나 '이어받다'로 풀어내면 됩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살갑고 곱고 맑게 가다듬는 말글을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습니다. 또한, 얄궂고 꾀죄죄하며 못나게 내팽개치는 말글을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어요. 우리들이 슬기롭고 넉넉하며 따스하고 아름다이 살아가는 어른들이라 한다면 마땅히 아이들한테는 슬기로운 말을 물려줍니다. 넉넉한 말을 물려줍니다. 따스한 말을 물려줍니다. 아름다운 말을 물려줍니다.

 

우리 어른들이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삶과 말과 넋을 물려줍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쩌는 수 없이 어른들 삶과 말과 넋을 물려받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물려준 삶과 말과 넋 가운데 좋은 대목만 살살 골라서 물려받을 수 있지만, 외려 짓궂고 얄궂고 못나고 더럽고 슬프고 어이없고 모자라고 바보스런 대목만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물려받을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무엇을 물려줄 수 있도록 삶을 꾸릴는지 또한 알 노릇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어른들은 맑은 삶은 버리고 돈에 팔린 삶만 붙잡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어른들은 착한 삶은 등돌리고 돈에 눈먼 삶만 움켜쥐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우리 어른들은 어여쁜 삶은 모른 척하고 돈에 넋나간 삶에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ㄴ. 약체화되다

 

.. 그러나 극단적으로 약체화된 이 회사를 흡수해 줄 만한 상사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  <마루야마 겐지/조양욱 옮김-산 자의 길>(현대문학북스,2001) 95쪽

 

'극단적(極端的)으로'는 '몹시'나 '끝간데까지'나 '끔찍하게'나 '더없이'나 '더할 나위 없이'로 다듬습니다. '흡수(吸收)해­'는 '받아들여'나 '끌어안아'로 손질하고, '상사(商社)'는 그대로 둘 수 있으나 이 자리에서는 '큰 회사'나 '큰 기업'으로 손질해 봅니다.

 

 ┌ 약체화(弱體化) : 본래보다 약하여짐

 │   - 조직의 약체화 / 당이 약체화되다 / 체제가 점차 약체화하다 /

 │     우리 팀이 약체화하였다고 보면 안 돼

 ├ 약체(弱體)

 │  (1) 허약한 몸

 │  (2) 실력이나 능력이 약한 조직체

 │   - 상대 팀이 비록 약체로 알려져 있지만, 경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

 ├ 약체화된 이 회사

 │→ 힘이 빠진 이 회사

 │→ 허물어진 이 회사

 │→ 무너지는 이 회사

 │→ 흔들리는 이 회사

 └ …

 

'허약(虛弱)'한 몸을 가리킨다고 하는 한자말 '약체'입니다. 그러면 '허약'한 몸이란 어떤 몸일까요? 다름아닌 "힘이 없는" 몸이거나 "기운이 없는" 몸입니다. 또는 '약(弱)'한 몸이라 합니다. 그러면 '약'한 몸이란 어떤 몸일까요? 바로 "튼튼하지 못한" 몸이거나 "힘이 작은" 몸이거나 "힘이 세지 못한" 몸이라 합니다. 우리 말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여린' 몸입니다.

 

 ┌ 조직의 약체화 → 조직이 줄어들다 / 조직힘이 줄다 / 조직이 움츠러들다

 ├ 당이 약체화되다 → 당이 힘을 잃다 / 당이 작아지다

 ├ 체제가 점차 약체화되다 → 틀이 차츰 여려지다 / 틀이 나날이 힘을 잃다

 └ 우리 팀이 약체화하였다고 → 우리 팀이 힘이 잃었다고 / 우리 팀이 처진다고

 

저는 어릴 때부터 몹시 '허약'한 아이였습니다. 집에서고 동네에서고 학교에서고 이런 소리를 익히 들었습니다. 중학생이던 저를 형이 무술학원에 집어넣어 얻어맞으며 몸을 갈고닦도록 한 까닭에 어릴 때와 견주면 여러모로 몸이 튼튼해졌다고 할 만하지만, 밑 뼈대는 그리 단단하지 않은 몸이 아닌가 싶습니다.

 

늘 듣는 '허약'이라는 소리이다 보니, 어린 날부터 이 낱말을 곰곰이 되짚었습니다. 썩 듣기 좋은 말이 아닐 뿐더러, 저를 깊이 걱정하면서 이 같은 말을 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어린 저는 '허약'이니 '약하다'이니를 국어사전에서 뒤적이며 말뜻을 살폈고, 이 낱말을 안 쓰고 싶어 이모저모 생각을 이었습니다. 이러다가 '여리다'라는 낱말을 알아냈고, 어른들은 으레 '弱하다'라고만 이야기하지 '여리다'라고는 말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센 박자'와 '여린 박자'라고는 말을 하지만, 저처럼 몸이 튼튼하지 않은 아이를 놓고 "저 아이는 여린 아이예요." 하고는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 비록 약체로 알려져 있지만

 │

 │→ 비록 힘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 비록 힘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 비록 잘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 비록 한수 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 …

 

곰곰이 헤아려 보면 힘이 센 사람을 가리켜 '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힘이 여린 사람을 놓고 '여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센사람-여린사람'이라 해 볼 수 있어요. 힘이 센 나라를 두고 '강대국(强大國)'이나 '강국(强國)'이라고만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센나라'라 할 수 있어요. 국어사전 말풀이를 들여다보아도 "강국 : 병력이 강하고 영토가 넓이 힘이 센 나라"입니다. 말풀이에 "센 나라"라고도 나오고, '强하다'란 다름아닌 '세다'를 뜻합니다.

 

이와 같은 말흐름을 곱씹어 본다면 '약체가 된다'를 가리키는 '약체화'란 바로 "힘이 여린 몸이 된다"는 소리로, "힘이 여리고 만다"는 소리이며 "힘이 줄어든다"는 소리이고 "힘이 없어진다"는 소리입니다.

 

말 그대로 쓰면서 말과 글을 살릴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꾸밈없이 쓰는 가운데 힘을 잃거나 주눅들어 있는 우리 말글을 튼튼하고 다부지게 북돋울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살가이 쓰면서 힘이 여린 우리 말글을 알차고 싱그럽게 가꿀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3.23 13:27ⓒ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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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외마디 한자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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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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