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은 청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리뷰] 시마다 소지 <이방의 기사>

등록 2010.04.21 09:12수정 2010.04.2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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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방의 기사> 겉표지

<이방의 기사> 겉표지 ⓒ 시공사

▲ <이방의 기사> 겉표지 ⓒ 시공사

기억을 잃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술을 잔뜩 퍼마신 다음날, 전날 밤 몇 시간의 기억이 깨끗이 사라질 때가 있다. 집에 무사히 들어왔더라도 그럴 때면 당혹감과 함께 걱정이 앞선다.

 

같이 술을 마셨던 친구들에게 전날 나의 행동을 물어보기도 꺼려진다. 그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한 행동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기억상실증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 과거 몇 년 동안의 기억이 통채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가졌지만 과거의 기억이 없다면 공황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시마다 소지의 <이방의 기사>에서 이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등장한다. 20대 중반으로 짐작되는 주인공은 어느날 저녁 공원의 벤치에서 정신을 차린다. 자신이 그곳에서 몇 시간 잤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동안 무의식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은 주인공

 

주인공은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왜 여기로 왔는지 기억을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술 더떠서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바지를 입은걸로 봐서 남자인 것 같은데 자신의 이름도 나이도 기억을 못한다. 지갑에는 돈이 몇 푼 있을뿐 신분증도 없다. 당연히 자신의 집도 직장도 모르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다.

 

경찰서를 찾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만 그것도 좀 민망스럽다. 경찰들에게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다행이 주인공은 모든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니다. 도쿄 지하철 노선도 대충 기억하고 있고 운전기술도 잊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고능력도 가지고 있다. 기억만 떠오르면 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정말 환장할 노릇일 것이다.

 

주인공은 거리를 걷다가 젊은 여성 료코와 마주친다. 료코는 약간 넋이 나간듯한 주인공에게 다정하게 접근해서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주인공이 기억상실증에 빠졌어도 개의치 않는 듯하다. 료코는 주인공에게 이사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편하게 쉬게 해준다.

 

이때부터 젊은 여성과 기억을 잃은 남성간의 동거가 시작된다. 기억이 없지만 일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주인공은 가명으로 인근 공장에 취직하고, 료코는 제과점에서 성실하게 일을 시작한다.

 

나름대로 안정적이고 행복한 생활속에서도 과거에 대한 호기심은 어쩔 수가 없다. 주인공은 우연히 자신의 신분증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서 자신이 예전에 살던 집 주소도 알게된다. 그곳에 가보면 잊은 기억을 한꺼번에 되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또다른 두려움을 느낀다.

 

혹시라도 자신이 결혼한 몸은 아닐까. 옛집에 갔는데 기억에도 없는 처자식이 놀라면서 자신을 맞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되면 지금 료코와의 생활도 끝나는 것이다. 주인공에게 과거의 자신은 반갑지 않은 존재다. 그런 망설임 속에서도 주인공은 조금씩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왜 자신은 모든 기억을 잃고 벤치에 누워있었을까?

 

조금씩 밝혀지는 주인공의 과거

 

무엇이건 잃어버리는 것은 쉬워도 되찾는 것은 어렵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계기로 모든 기억이 되살아날 수도 있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작품 속의 한 인물은 기억장애에 대해서 주인공에게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주인공은 '재생장애'를 앓고 있다. 글자그대로 기억이 재생되지 않는 것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경미한 일을 깜박하거나 순간적으로 떠올리지 못할 때가 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면 기억이 돌아온다. 주인공은 과거의 일이 전혀 재생되지 않으니 심각한 수준의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쉽게 분석할 수는 있어도 치료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본인이 스스로 각성할 때까지 기다리고 지켜보는 수밖에. 인생이 꼬여버린 사람들은 모든 과거를 지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방의 기사>의 주인공은 본의아니게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전생을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과거에 다가간다. 그 과거가 자신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데. 기억을 잃는 것은 시력을 잃는 것 만큼이나 두려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방의 기사> 시마다 소지 지음 / 한희선 옮김. 시공사 펴냄.

2010.04.21 09:12ⓒ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방의 기사> 시마다 소지 지음 / 한희선 옮김. 시공사 펴냄.

이방의 기사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시공사, 2010


#이방의 기사 #기억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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