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61) 자(尺度)

[우리 말에 마음쓰기 942] '개심(開心)'과 '눈뜸-마음열림'

등록 2010.07.25 15:10수정 2010.07.2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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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자(尺度)

 

.. 도대체 미묘하고 多樣하기 그지없는 人間을 잴 수 있는 자(尺度)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  <영혼의 모음>(법정, 동서문화사,1973) 14쪽

 

'도대체(都大體)'는 '참말로'로 다듬고, '미묘(微妙)하고'는 '야릇하고'나 '알쏭달쏭하고'로 다듬습니다. '人間'은 '사람'으로 손보고, '多樣하기'는 '다 다르기'로 손봅니다. "어디에 있을 것인가"는 "어디에 있겠는가"로 손질해 줍니다.

 

 ┌ 척도(尺度)

 │  (1) 자로 재는 길이의 표준

 │  (2) 평가하거나 측정할 때 의거할 기준

 │   - 미의 척도 / 돈을 가치의 척도로 삼다

 │

 ├ 잴 수 있는 자(尺度)가

 │→ 잴 수 있는 자가

 │→ 잴 수 있는 눈금이

 │→ 잴 수 있는 눈금자가

 └ …

 

이 글에서는 '尺度'라는 한자를 따로 밝혀 적습니다. 글쓴이로서는 아무래도 토박이말 '자'만 적으면 뜻이나 느낌이 살아나지 않는다고 느꼈구나 싶습니다. '者'하고 헷갈린다 싶어 이와 같이 적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토박이말 '자'하고 헷갈려 '尺度'를 적으려 했다면, 처음부터 '자'가 아닌 '척도'라 적을 노릇이라고 봅니다. 적기는 토박이말로 적어 놓고, 말뜻은 한자로 적는다면, 이 글은 누가 읽으라고 하는 셈인지 아리송합니다. 한자 지식이 있는 사람한테 도움이 되도록 이렇게 적었다면, 오히려 '자' 아닌 '척도'라고 적어야 올바르고, 이렇게 한자 지식이 있는 사람한테 읽힐 글로 썼다면, 아예 한문으로 글을 쓸 노릇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보기글에서만 해도 '多樣하기'와 '人間'을 한자로 적어 놓습니다. 한자말 '도대체'와 '미묘'는 한글로 적습니다. '다양'이나 '인간'으로 적으면 알아듣기 힘들다고 느껴, 두 가지 낱말은 한자로 밝혀 적었을까 생각해 보노라니 이런 마음은 아니었구나 싶은데, 한자 지식을 뽐내며 쓰는 글은 앞과 뒤가 어설프거나 제대로 안 이어지도록 해 놓기 일쑤입니다.

 

 ┌ 사람을 잴 수 있는 틀이 어디에 있겠는가

 ├ 사람을 무슨 자로 재겠는가

 ├ 사람을 어떻게 따지거나 재겠는가

 └ …

 

조금이나마 우리 말을 생각했다면, '눈금'이나 '눈금자' 같은 낱말로 적어 주었으리라 봅니다. 또는 '재는 틀'이나 '재는 연장'처럼 적어 보았겠지요. 아주 단출하게 가다듬어 "사람을 무슨 수로 재겠는가"라든지 "사람을 어떻게 재겠는가"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우리 말을 생각하지 않으니 얄궂은 말투가 튀어나옵니다. 손쉽고 바르게 적는 글을 잊거나 잃습니다. 내 마음 알차게 펼치지 못하고, 내 생각 그윽하게 나누지 못합니다.

 

ㄴ. 개심(開心)

 

.. 그 경이로움은 눈과 마음이 활짝 열리는 '개심(開心)'의 경지를 경험하게 한다 ..  <이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김경애, 수류산방,2007) 33쪽

 

'경이(驚異)로움'은 '놀라움'이나 '엄청난 놀라움'으로 다듬고, '경지(境地)'는 '자리'로 다듬어 봅니다. '경험(經驗)하게'는 '겪게'나 '겪어 보게'로 손질해 줍니다.

 

 ┌ 개심(開心) : [불교] 지혜를 일깨워 열어 줌

 │

 ├ 눈과 마음이 활짝 열리는 '개심(開心)'의 경지를

 │→ 눈과 마음이 활짝 열리는 '눈뜸'이라는 자리를

 │→ 눈과 마음이 활짝 열리는 '마음열림'이라는 자리를

 │→ 눈과 마음이 활짝 열리는 느낌이 무엇인가를

 │→ 눈과 마음이 활짝 열리는 맛이 어떠한가를

 └ …

 

불교에서는 '개심'이라는 한자말을 빌어 "슬기로움을 일깨워 열어 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한자말 풀이 그대로 '열다 + 마음'이기에, 우리 불교밭이든 여느 사람 삶자리이든 '마음열기'나 '열린마음'이라는 말마디로 이러한 모습을 가리킬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에는 우리 글이 따로 없어 한자를 빌어 '開心'이라 적었고, 오늘날에는 우리 글이 있으나 우리 마음과 삶과 넋을 우리 글로 담아내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 깜냥이 모자랍니다. 슬프지만 우리 슬기가 나아지지 못합니다.

 

출판사 가운데 '열린책들'이 있습니다만, '열린마음'이나 '열린생각'이나 '열린영화'나 '열린노래'나 '열린문화'처럼 '열린-'을 앞가지로 삼아 우리 삶자락을 한 올 두 올 풀어낼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도록 한다는 뜻으로 '마음열기'를 쓰지 못하니, '마음닦이'나 '마음가꾸기'나 '마음일구기'나 '마음보듬기'나 '마음살피기' 같은 낱말을 하나둘 빚어낼 꿈을 펼치지 못합니다.

 

 ┌ 열린마음 / 열린눈 / 열린넋 / 열린꿈 / 열린사랑 / 열린사람

 ├ 마음열기 / 마음닦이 / 마음나눔 / 마음두기 / 마음쓰기 / 마음닫기

 └ 눈열기 / 눈뜸 / 눈뜨기 / 눈닦이 / 눈감기 / 눈닫기

 

우리한테는 우리 글이 있고 우리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부터 이어온 말을 우리 글에 알뜰살뜰 담아내면 됩니다. 새로운 삶터에 새롭게 흘러들거나 스며들거나 태어나는 이야기를 우리 글에 차곡차곡 실어내면 됩니다. 새 문화와 문명에 따라 바깥에서 새말을 들여오기도 할 터이나, 우리 슬기와 깜냥으로 우리 터전에 걸맞게 새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우리 슬기를 빛내어 우리 새말을 일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온힘을 쏟아 우리 깜냥을 갈고닦으며 우리 새말을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 그 놀라움은 눈가 마음이 활짝 열리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

 ├ 그 대단함은 눈과 마음이 활짝 열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 그 아름다움은 눈과 마음이 활짝 열리는 무지개나라로 들어가게 한다

 └ …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는 우리 말을 우리 글에 알차게 담으면서 우리 말빛을 뽐내고 우리 말넋을 키워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말힘을 우리 스스로 북돋울 수 있음을 느껴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말삶을 우리 손으로 어여쁘게 추스를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른 말로 싱그럽게 담아내는 길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면서 고운 삶결을 사람마다 다른 말결로 알록달록 펼쳐내는 길을 찾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우리 모습이요, 슬프지만 우리 얼굴입니다.

 

다만, 오늘까지 이렇게 안타깝고 슬프다 하여도, 앞으로는 반갑고 기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7.25 15:10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묶음표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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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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