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모텔에서 발견된 자살한 형사

[리뷰] 마이클 코넬리 <블랙 아이스>

등록 2010.12.29 09:26수정 2010.12.2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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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블랙 아이스> 겉표지

<블랙 아이스> 겉표지 ⓒ 랜덤하우스

작품의 제목인 '블랙 아이스'는 코카인과 헤로인 등을 합성해서 만든 신종 마약을 가리킨다. 그 안에 불순물이 다량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블랙 아이스'에는 다른 의미도 있다. 겨울에 비가 내리고 나면 빗물이 도로에서 얼어버린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생겨서 잘 보이지 않는 그래서 미끄러지기 쉬운 검은 얼음, 그것도 '블랙 아이스'다.


작품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블랙 아이스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의 조언을 회상한다.

'블랙 아이스를 조심해. 눈앞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잘 보이지가 않는다. 위험 속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보이는데 그땐 때가 늦어.'

눈앞에 웅크리고 있는 위험을 모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위험은 유혹의 형태로 다가오기도 한다.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면 한 밑천 챙길 수 있다는 유혹. 이런 유혹에 빠져버렸을 때가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

의문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형사

마이클 코넬리의 93년 작품 <블랙 아이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형사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평화로운 크리스마스 저녁, LA 경찰국 마약단속반 소속 칼 무어 형사가 한 모텔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현장의 상태로 보아서는 산탄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자살한 것 같다.


무어는 사망 일주일 전부터 실종상태였고 현장에서는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라고 써진 유서도 발견된다. 지문대조를 통해서 시체의 신원이 칼 무어라는 사실도 확인된다. 뭔가 비리에 연루된 형사가, 혹은 업무과중을 이기지 못한 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인다.

이 현장에 주인공인 해리 보슈 형사가 나타난다. 보슈는 상관으로부터 죽은 무어 형사의 미망인에게 사망소식을 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모든 형사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일을 떠맡은 것이다.


미망인 실비아는 몇 달 전부터 무어 형사와는 별거중이었다. 자택에서 보슈를 맞은 실비아는 무어 형사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무어는 오래 전부터 과거에 집착해 왔다는 것이다. 현재나 미래보다는 항상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무어가 가지고 있던 과거에 대한 갈망이 부부 관계를 갈라놓은 것이다. 무어는 마음을 닫아걸고, 얼마 후에는 실비아도 마음을 닫았다. 부부 사이는 그렇게 끝장났다.

무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도시다. 그 국경을 통해서 수많은 물건들이 밀수된다. 대표적인 것은 마약이다. 무어가 마약단속반 소속이었고 멕시코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면, 마약단속을 하는 중에 멕시코인 마약상인들과 접했을 가능성도 많다. 거기서 무어의 죽음도 시작된 것 아닐까?

과거의 상처를 씻으려는 형사 해리 보슈

<블랙 아이스>는 '해리 보슈 시리즈'의 두 번째 편이다. 자살한 칼 무어처럼 해리 보슈도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보슈는 아버지없이 성장했고,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거리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이후 보호시설을 전전하던 보슈는 16살때 군인이 되서 베트남전에 참전한다. 10대에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어버린 셈이다.

무어와는 달리 보슈는 어두운 기억을 극복하려 노력한다. 아직도 가끔 베트남전의 악몽을 꾸고 한때는 수면장애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현실을 직시하며 과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가 LA에서 형사가 된 것도 그런 이유다. LA에서는 삶의 방식도 다양하고 죽음의 방식도 다양하다. 누가 언제 어떻게 죽던지 간에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 LA다.

경찰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경찰이 모텔방에서 산탄총으로 자살할 수도 있다. 보슈는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무어의 과거를 알아 갈수록, 무어의 과거가 자신의 과거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에 현재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보슈는 살인범들을 추적하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한다. 무어는 과거로 과거로 내려가면서 스스로 자신에게 덫을 놓고 있었다. 작품 속의 이야기처럼, 자신이 파놓은 함정보다 더 깊은 함정은 없다.

덧붙이는 글 | <블랙 아이스> 마이클 코넬리 지음 / 한정아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덧붙이는 글 <블랙 아이스> 마이클 코넬리 지음 / 한정아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블랙 아이스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10


#블랙 아이스 #해리 보슈 #마이클 코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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