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전 대통령
이화장
특무대 문서철을 통해 새롭게 확인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11사단 9연대 3대대가 공식적인 작전명령에 따라 산청·함양·거창 일대의 민간인을 집단학살했다. 이 문서철에는 작명5호 부록의 원래 내용, 즉 "적의 손에 있는('치안미확보' 즉 '미수복지구')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 작전이 처음부터 민간인에까지 무차별을 지시했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최덕신 사령관의 구두명령을 받은 것이라는 당시 9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의 증언도 첨부되어 있다.
이 작전명은 재판과정에서 "작전 지역에서 이적 행위자를 발견 시는 즉결하라"는 내용으로 위변조됐다. 특무대로 이첩될 당시 헌병대 보고서에 첨부된 서류 목록에는 '현장사진'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현재 특무대 문서철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둘째, 사건의 조작과 은폐, 그리고 왜곡이 국방부와 경남계엄사, 경남도경 등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문서철에 따르면 신성모 국방장관은 민간인 학살사건이 국내외로 비화하자 경남 거창 신원면 사건을 방문한다. 1951년 3월 10일 비밀회의에서 신성모는 경남계엄민사부장인 김종원과 특무대원 계종운, 거창 경찰서 사찰계 유봉순에게 사건의 조작과 은폐, 왜곡을 지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특무대의 개입과 역할이다. 특무대는 이승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창설된 군정보기구다. 해방 이전 미정보기관과의 접촉을 통해 군정보기관의 중요성을 일찍이 숙지하고 있었던 이승만은 남한에 주둔 중이던 미 제971 CIC 파견대를 모방하여 방첩대를 창설했다. 창설 이후 이 기구는 이승만의 정권획득 및 유지,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이용됐으며, 특히 "상부의 특명사항처리"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승만은 단정 수립 이후 정권유지와 강화를 위해서는 '정적'은 체제전복을 꾀하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단정지었고,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적 기관화가 가능한 방첩기관이 필요하였는데, 이것이 곧 특무대였다.
실제 이승만은 거창사건이 외신에 대서특필되자 "치마 속 부끄러운 곳은 외국에 내보이지 말라고 했지 않아"라며, 반성은커녕 외국 언론에만 신경쓰는 행태를 보였다. 이승만의 분신이었던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이러한 이승만의 심기를 의식, 최덕신에게 걱정말고 토벌작전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심지어는 100만 원의 격려금까지 내린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9연대는 유아사체 처리, 경남도경과 거창경찰서는 여론단속과 반증수집, 국회의원 무마, 유족 및 주민 협박 등을 각각 담당하도록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셋째, 피학살자의 규모가 의도적으로 축소됐다. 거창사건의 사망자는 총 517명으로 확인되며 이들의 주소, 나이, 성별, 직업 등이 구체적으로 조사되어 있다. 1960년 4·19 이후 <동아일보>에 명단이 그래도 실리기도 했는데, 사건 재판 당시에는 187명이라는 허위 숫자가 제시됐다. 총 517명의 피학살자 중 여성이 남성보다 많고, 만 1세 이상 16세 이하의 어린이가 217명에 이르러 피학살자의 42%가 어린이였다. 61세 이상도 51명으로 전체 피학살자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특무대 문서철에는 특무대 보고서와 헌병대 보고서, 그리고 거창경찰서 보고서 등에서 피학살자 수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수는 보고서마다 차이를 보인다.
넷째, 유아사체가 유기돼 은폐됐다. 어린이들의 희생을 은폐하기 위해 이들의 사체는 신성모 국방장관 주재의 비밀회의 직후인 3월 11일 오전 6시에 9연대 부연대장 지휘 하에 하사관 교육대가 동원돼 처리됐다. 이 과정은 '시체처리 현황보고'라는 제목으로 작성되어 11사단장이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에게 보고됐다.
다섯째, 여성 강간 및 재산탈취행위가 은폐됐다. 통상적으로 국가 공권력에 의한 여성 피해는 진실의 사각지대에 위치한다. 기록되지 않은 범죄로 가장 흔한 것이 여성이 입은 피해, 그중에서도 성적 피해와 강간이다. 여성들은 대체로 자기 경험을 축소하거나 집안 남자들의 이야기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나라의 진실위 조사에서도 나타나듯이 여성들이 겪은 피해가 '2차적인 경험'으로 보고되기도 한다.
거창사건에서도 집단학살 전후로 여성들을 골라내서 성폭행·강간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는 주민들의 증언뿐만 아니라 경찰조사에서도 확인됐으나 철저히 은폐됐다. 그리고 농우 20여 두등을 탈취하고 토벌작전을 핑계로 주민들에게 식사와 위로비, 정보비를 부과하며 교실 자재를 뜯어 땔감으로 쓰는 등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한 예로 거창군시국대책위원회는 토벌작전을 위해 총 100여만 원(현재 시가 약 17억 8000만 원)을 대여 형식으로 지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섯째, 산청·함양사건이 은폐됐다. 헌병사령부는 초기 조사를 통해 총 220명 피학살의 인명피해와 가옥소각, 농우탈취, 교실방화 등 물적피해를 조사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거창사건에 묻혀 철저히 은폐됐다.
다시 기무사 손에 넘어간 특무대 문서철, 요원한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