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쌤, 저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되나요?"

'화성녀'를 사랑한 '어린 왕자' 이야기

등록 2012.11.02 09:12수정 2012.11.02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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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 우리 반 혜리(가명)와 이런 문자를 주고받았습니다.

"쌤, 저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되나요? 생일인데 기분만 안 좋아서 그래요."
"네 생일 축시 코팅해서 준비해놓고 널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말이야. 열심히 하면 되지 그런 생각을 왜 해?"
"그냥 가기 싫어요. 요즘에 기분도 더 안 좋고 가족과도 사이가 안 좋고.ㅠㅠ"
"그래도 그러면 안 돼. 요즘 내가 많이 좋아져서 일부러 더 나무란다고 엄마한데도 말씀드렸어. 오늘 학교 안 오고 너 혼자 있으면 더 비참해지잖아. 마음 추스르고 어서 오너라."

문자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전화를 걸었는데 다행히 통화가 되었습니다.

"쌤이야. 오늘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쌤 생각만 해주면 안 되겠니? 너를 위해서 밤새 시를 썼거든. 애들 축하 싸인 받아서 코팅도 다 해놓았는데 안 오면 섭섭하잖아. 요즘 네가 표정도 많이 환해지고 반 애들하고도 사이가 좋아진 것 같아서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래. 일단 나와서 나하고 얘기하자. 바로 올 거지?" 
"…예."  

'예'라는 대답에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1교시는 영어전용교실에서 원어민 보조교사와 함께 하는 영어회화 수업이었습니다. 원어민 교사가 저의 바통을 받아 수업을 하는 사이, 교실 한 쪽 구석으로 가서 혜리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1교시 끝나기 전에 왔으면 좋겠다. 알았지?"

다시 10분쯤 수업에 열중하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녀석이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풀이 죽어 있는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고는 수업이 끝나자 매점으로 달려가서 사탕 35개를 샀습니다. 반장을 시켜서 사탕을 하나씩 나누어준 뒤에 혜리를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여느 때처럼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전체 아이들 앞에서 생일시를 읽어주었습니다.


배추 밭을 지나며

요즘
널 보는 재미로 산다고 말하면
넌 그 말을 믿을까?
하긴, 생일이 코앞인데
편지는커녕 문자 한 통 없더니
어제도 어김없이 보충수업 땡땡이 치고
달아나버린 너를 어찌......


그래도 난 널 보는 재미로
요즘 하루하루를 건넌다.
마치 가을 배추밭을 지날 때처럼
저것들이 곧 추수할 때가 오겠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해지듯
요즘 책을 읽기 시작한 너를 보면서
너의 가을도 깊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너의 오랜 빈자리가
내 잘못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을 때도
먼먼 길에서 다시 돌아왔지만
아직은 적응 못하고 겉돌았을 때도
난 언젠가는 네가 잘 자란
한 포기의 찬란한 배추가 될 것을
꿈꾸곤 했단다.

너의 꿈은 아직
네가 원하는 미용사와
부모님이 원하시는 영양사 사이에 있다지.
너를 향한 나의 꿈이 이루어지듯
네 자신을 향한 너의 아름다운 꿈도
꼭 이루어지기를.

2012년 10월 31일
사랑하는 혜리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선생님이.

그런데 생일시를 읽어주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생일시를 읽어주면서는 눈물을 흘려본 기억이 별로 없는데 이번에는 시를 읽다가 몇 번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너의 오랜 빈자리가
내 잘못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을 때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추스르고 다시 읽으려 해도 '잘못'이라는 단어에서 번번이 소리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시를 읽는데 5분 넘게 걸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시를 낭송하고, 코팅한 시를 전해주고, 가볍게 안아주고 난 뒤 혜리에게 다가가 물어보았습니다.

"시 마음에 드니?"
"예."

정말 마음에 드는지 모처럼 아이의 얼굴 표정이 환해보였습니다. 그런데 혜리의 환한 표정 말고도 저에게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한 동안 서로 반목하고 할퀴고 상처를 주었던 몇몇 아이들의 표정이었습니다. '내 잘못'만 같아서…라고 제가 목이 메어 시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을 때 아이들도 그 대목에서 마음을 함께 멈추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번에는 그랬지만 생일시를 낭송하는 분위기가 늘 이러지만은 않습니다. 지난번에 생일을 맞은 우리 반 화성녀 원주에게 생일시를 읽어줄 때는 분위기가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답니다.

'화성녀'를 사랑한 '어린왕자' 이야기

우리 반 화성녀 원주 언니! 
우리 반 자칭 어린왕자 담탱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늘 어느 한 쪽이 기우뚱했으니… 

"원주야, 사랑해!~"
"전 별론데요."
"에이, 너도 나 사랑하잖아."
"아, 짜증나!" 

어느 날은 담탱이가 화성녀에게
전화로 수작을 걸었는데…

"원주야, 너 솔직히 말해 봐."
"뭘요?"
"너 나 좋아하지?"
"예."
"…(감동에 할 말을 잃음)"

"아닌데요."라는 퉁명스런 대답을 기대했던 담탱이는
뜻밖의 대답에 심기일전하여 어느 날 화성녀를  
순천 웃장 전통 국밥집으로 데리고 가는데…

"원주야!"
"왜요?"
"그냥 불러봤어. 근데 오늘 보니 너 입술 되게 작다!"
"예. 저 입술 작아요."
"국밥 맛있어?"
"예. 저 국밥 되게 좋아해요."
"언제부터 국밥을 좋아하게 된 거야?"
"제 남친이 국밥을 좋아해서요."
"…(충격으로 할 말을 잃음)"

원주야, 네 남친과 깨지지 말고 잘 되길 빈다. 흑흑...
그리고 생일을 축하한다, 너의 새로운 시작을!

2012년 10월 11일
사랑하는 원주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선생님이.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교육공동체 벗>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순천효산고등학교 #교육공동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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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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