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죽음에도 찾지 않던 고향인데..."

[인터뷰] 2009년 한국에서 쫓겨나 네팔에 정착한 '스탑크랙다운' 미누씨

등록 2013.08.10 12:10수정 2013.08.1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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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한강이여 넌 날 꿈꾸게 해
난 항상 이 자리에 헤매이고 있어
난 괜찮아 꿈을 버리진 않아
한번쯤 말을 해줘 나도 해낼 수 있다고
언젠가 웃을 수 있는 날들이 온다고
- 스탑크랙다운 <한강에게>


몸도 마음도 모두 한국에 데려왔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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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책 읽어요" 미누의 학원 사무실 책상에 있는 책들. 네팔에서도 여전히 한국어 책을 읽는다. 한국의 친구들이 종종 선물해준다고. 오프라윈프리 자서전부터 시집·소설·인권 서적·한국어 교재 등 다양하다. ⓒ 김성민

'코리안 드림'을 쫓아 한국에 왔던 이가 있다. 한강을 보며 꿈을 꿨던 그는 이제 한강을 볼 수 없다. 다국적 노동자 밴드인 '스탑크랙다운'의 보컬이자 리더로서 한강에 대한 꿈을 노래하고, 이주노동자들의 아픔을 노래하던 그는 2009년 말 불법체류자로 강제추방당했다.

어떤 이에게는 고향에 돌아가는 게 꿈이겠지만 그는 반대였다. 고국에 돌아간 지 3년이 넘었지만 꿈처럼 남아있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었다. 여전히 한국과 관계된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한 그를 지난 6월 네팔 현지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92년 2월 2일이었어요. 날짜에 2가 많아 기억이 나요. 처음으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냉장고 문을 연 느낌이었어요. 난생 처음 느끼는 추위였죠.

한국에 가기 전에는 한국이 불교국가라 사람들이 다 착할 것 같았는데 막상 서울에 가니까 빨간 십자가가 많아서 공동묘지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처음에 한국 음식점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처음 몇 달을 제외하고는 한국 사람하고 살았어요. 그래서 한국 음식에 빨리 익숙해졌고 한국말도 빨리 늘었죠. 첫 월급은 40만 원이 좀 안 됐었어요."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에 그는 한국에 왔다. 고용허가제도 산업연수생제도도 없었던 시절, 그는 브로커를 통해 차가운 여관방에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네팔인들에게 있는 '코리안 드림'을 당시 스무살이었던 미누도 갖고 있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 꿈은 현실과 달랐다는 것을 알았지만, 미누는 빠르게 한국 사회에 녹아들었다. 수많은 네팔인들이 외국으로 일을 하러 가지만 대개는 자국인들끼리 생활을 하며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말하자면 몸은 외국에 있지만 마음은 고향에 있는 것. 하지만 미누는 초창기부터 몸도 마음도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

"강제추방 열풍, 덜컥 겁이 났다"던 미누, 마이크를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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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설명 중인 미누 미누는 말의 느낌도, 몸짓도, 표정과 얼굴도 한국사람같다. 처음 만나는 사람은 잘 구분하지 못할 정도. 이렇게 되기까지 그에겐 많은 세월과 노력 그리고 한국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인터뷰 중 진하게 묻어나왔다. ⓒ 김성민


"운동은 잘 몰랐어요. 단체도 거의 가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네팔인들 사이에서 한국말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면서 임금 체불이 되거나 다치거나 할 때 종종 도와주곤 했어요. 그때 말을 잘하는 게 좋다고 느꼈어요. 식당 노래방 기계에서 노래를 실컷 불렀는데 노래를 잘한다고 알려지면서 이런 저런 행사에도 초대받기도 했죠. 어떤 행사에 노래를 부르러 갔을 때 이란주(당시 부천 외국인노동자의 집 사무국장)씨를 처음 만났고 그의 권유로 1999년도 외국인 예능대회에 나갔어요. 신분 때문에 불안했는데 '녹색지대'의 노래를 불러서 우승을 했고 공중파 설날특집·밀레니엄특집 같은 프로그램에 나갔었죠. 말하자면 가수로 데뷔한 셈이에요."

미누는 '일하면서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이주노동자 단체나 운동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던, 굳이 따지자면 운동가가 아닌 예능인이었다. 그는 일하는데 적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았지만 1999년도 까지는 그게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공중파에도 나오고 문화부장관의 상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평화로운 세월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3년이었나, 강제추방 열풍이 불기 시작했어요. 양희은씨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들었는데 사이렌 소리가 나오면서 불법체류자를 신고하라고 했는데 겁이 덜컥 났죠. '아, 나도 외국인 노동자구나, 쫓겨날 수 있겠구나'라는 불안함이 생겼어요. 동대문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면서 달동네에 살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어요. 그전까지는 똑같이 일했었는데…. '당장 고향에 갈까, 아니면 숨어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네팔에 돌아가지 않았었는데 말이죠.

그때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러 갔어요. 아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가 된 기분이었죠. 다들 단체별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농성장이 갈라지고 성공회대 쪽 농성장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쪽으로 합류하게 됐어요. 이대로 쫓겨나기 아쉬웠고, 나도 여기 같이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국 투쟁가가 너무 어려워서 쉬운 노래를 만들게 됐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노래였으니까."

비슷한 시기에 왔던 샤말 타파라는 이주노동자가 명동성당에서 농성단의 대표로 투쟁을 주도하고 있을 때 미누는 막 운동을 시작했다. 그가 좋아했던, '노래'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다국적 노동자 밴드 스탑크랙다운은 그즈음 결성됐다.

정부 주도 다문화 사업보다 앞섰던 그의 '문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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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 무대에 오른 미누 네팔 주요 노조인 쥐폰트가 준비한 노동자 콘서트에서 미누가 무대에서 열창하고 있다. 한국에서 불렀던 스탑크랙다운노래를 네팔어로 불렀는데 관객들 반응이 좋았다고. 노동절 행사를 비롯해 그는 종종 무대에 오르긴 하지만 한국에서처럼 밴드활동을 하지는 못한다. ⓒ 미누제공

"무대에서 노래할 때면 사람들이 많아서 덜 불안했어요.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농성장에서 처음 노래하던 시절에 (강제추방 단속 때 사망한 이주노동자들의) 영정 속 사람들이 나한테 뭔가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당신이 뭔가 해야 한다고 말이죠. 노래하는 자리는 가리지 않았어요. 동네잔치에도 가고 집회에도 가고 대학교에도 가고…. 노래로 친구가 되는 것은 쉬웠어요. 

그러다가 이주노동자 방송에서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는데 신분이 불안정해서 결정이 쉽진 않았어요. 그래도 약자로만 사는 게 아니라 노래도 하고, 방송도 하고, 우리 이야기도 하고 싶었어요. 그때 친구들과 같이 한국 처음으로 다국적 뉴스를 시작했어요.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 뉴스도 하고….

지금 다문화다 뭐다 해서 이것저것 많이 하지만 그때 우리가 다 했던 거였어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이주민들에게 그리고 한국의 방송에 (우리가) 뭔가 기여한 게 있는 것 같아요. 강제추방당하면서 그런 것들을 모두 무시당하고, 무의미해져버린 것 같지만요. 그게 섭섭해요. 평가를 받지 못한 게…."

그는 소위 '문화운동'을 했다. 그의 현장은 노동조합이나 집회라기보다는 TV와 무대였다. 한국어로 노래하는 다국적 그룹활동을 하고 한국에 사는 다국적 사람들을 위한 방송을 만들었다. 정부 주도의 다문화사업들보다 10년은 앞선 활동이었고, 무엇보다 이주민들 스스로의 방송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강제추방으로 인해 그의 모든 활동은 '불법'으로 낙인 찍혔다.

"이주민이 집회장소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이주민들이) TV에도 자주 나오고, 동네술집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하는 것 같아요. 정치적 색깔 같은 것 없이 말이죠. 그래야 이웃이 되고 익숙한 사람이 되죠. 동네 친한 형 누나 같이요. 자꾸 사건 사고로만 등장시키고 투쟁으로만 보도되고…. 언론에 의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졌어요. 그래서 우리가 토크쇼 같은 것도 만들었어요. '미녀들의 수다'에는 미녀들만 나오지만, 우리가 만든 건 동네에 사는 이주민들이 나오는 것이었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그의 운동은 조직하고 투쟁하는 운동이라기보다는 '노래하고 이야기하며 친구가 되는 운동'이었다. 그런 그의 활동은 수유너머나 빈집과 같은 단체들과 관계를 맺게 하는 촉매가 되기도 했다.

"저는 출근하던 골목에서 붙잡혔어요. 올게 왔구나 싶었죠. 출입국관리소로 옮겨졌는데 밖에서 사람들이 집회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강제추방금지!'라고 외치는데 그게 갇혀 있는 상황에서 보니까 가위눌린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화성보호소로 옮겨져서 보름 정도 있었어요. 그때 사람들이 많이 보러 와줬어요. 먹을 것도 잔뜩 들고…. 한국에서 내가 친구가 많았구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려고 말도 열심히 익히고 항상 웃으면서 멋진 사람으로 살고 싶었었는데 그때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다는 걸 느꼈어요. 

항상 강한 이미지였던 고미숙 선생님도 면회를 오셔서 우셨어요. 바위에서 눈물이 나오는 느낌이랄까. 저도 눈물이 났는데 나중에 돌아서서 울었어요. 제가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죠. '웃는 미누'로 기억되고 싶었으니까. 잘해주셨던 분들, 저에게 활동하고 살 수 있는 공간을 주셨던 분들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평소에 얘기도 많이 못하고, 또 고맙다고 얘기도 못하고 와서 미안한 기분이에요."

"한국에 다시 가서 살던 곳 걷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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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친구 사회를 맡은 미누 2012년에 있었던 '안녕 친구'라는 행사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미누. 네팔에는 한국으로 일하러가는 사람들도 많고, 여행이나 NGO활동 목적으로 네팔을 찾는 한국인도 많다. 그만큼 관계가 깊은데 양쪽의 문화나 언어에 익숙한 미누는 그 중간 역할에 누구보다도 적임자이다. ⓒ 미누 제공

미누가 추방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추방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만큼 그는 친구가 많았다. 그는 한국인들과 친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항상 웃는 모습으로 기억되지만 남의 나라에서 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힘든 생활에도 의미 있는 일을 좇아 열심히 살던 미누는 어느 날 갑자기, 18년 만에 고국에 보내졌다. 강제로.

네팔에 태어나 20년 그리고 한국에 와서 18년, 햇수로만 따지면 엇비슷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어땠을까.

"카트만두에 와서 길을 걷는데 꿈 속에 있는 기분이었어요. 꿈처럼 좋다는 게 아니라 현실감이 안 들었어요. 영화를 보는 느낌? 제가 떠나올 때 젊은 아가씨였던 누나가 주름살 있는 아줌마가 돼 있었어요. 어머니 무덤에도 가고.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이 왜 이렇게 변했지?' 싶었죠.

네팔말도 처음에 익숙하지 않았고 식당에서 아이들이 일하는 것도 아동 노동으로 보였어요. 많은 것들을 한국을 기준으로 바라봤죠. 저도 어느 정도 한국인이 된 거예요. 그게 혼란스럽고 괴로웠어요. 그런 걸 몰랐으면 별로 괴롭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다시 돌아온 그에게 한국 생활은 '일장춘몽'이었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고, 세상도 변해 있었다. 그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는 네팔인이면서도 또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네팔에 비일비재한 혼란·아동 노동·느린 속도 등이 괴로웠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식당도 열어보고 단체도 만들어보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성급하게 준비했던 것 같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한국어 관광가이드·한국어 선생님 등을 하면서 그는 3년을 살아왔다.

"붕 떠 있는 기분이에요.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의미가 있다고 느껴졌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느꼈어요. 열정이 있었죠. 근데 여기서는 아직 그런 일을 찾지 못했어요. 네팔에 살고 있지만 네팔 사회에 속해있다는 기분은 잘 안들어요. 한국적 생활 습관이나 마음가짐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네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잘 이해가 안 될 때도 있고요. 아직 이 사회에서 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잘 안들어요. 한국 사회에 더 필요한 사람인 것 같은데…."

네팔에서 그는 종종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했지만 밴드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여건은 안 된단다. 한국에서 했던 이주민 방송이나 수유너머·빈집과 함께했던 활동을 네팔 사회에서 하기에는 여건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한국과 네팔 사이에는 3시간 15분의 시차만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요새 그는 한국어 학원을 열고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가려는 '예비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 문화나 일터의 현실에 대해서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또 공정무역 커피인 '아름다운 커피'의 현지 코디네이터 역할도 하고 있다. 네팔의 커피 산지를 같이 방문해 커피 생산자와 중간의 협동 조합 그리고 한국의 아름다운 커피 사이의 대화를 돕는다. 이쪽저쪽의 말과 생각을 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단다.

최근에는 여행자 거리에 한국식 술집도 열었다. 한국인들이 여행 와서 술 한 잔 하고 싶지만 위험해서 마음 놓고 마실 곳이 없는 형편이라 편하게 마시며 쉴 수 있는 곳을 만들었다고. 한국인들의 문화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기에 실현 가능한 콘셉트다.

"계획을 세우고 살지 않았어요. 운동을 해야겠다고, 내가 하는 게 운동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지도 않았어요. 다만 그때그때 열정이 생기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살았어요. 지금 혼란스러운 시기인 건 사실이지만 한국에 간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한국에서 한 활동들도 나쁜 일도 아니고…, 후회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일이 주어지고 내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일들이 하고 싶네요.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면 한국에 다시 가서 제가 살던 집 골목을 다시 걸어보고 싶어요. 남산타워를 보면서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싶네요."

오직 법과 제도만이 족쇄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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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와라 술집에서 카트만두의 여행자 거리 타멜 중심에 있는 와라와라라는 호프집. 한국인들의 술 문화에 맞춘 티베트 전통술을 파는 곳이다. 늦게까지 안전하게 여흥을 즐기며 전통 노래와 술·음식을 즐길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한다. ⓒ 김성민


그는 네팔과 한국의 경제적 격차라는 현실과 '코리안 드림'이라는 환상으로 한국으로 왔다. 관련 법조차 없을 때부터 시작해 산업연수생·고용허가제로 제도가 변하고 '불법체류자' 단속이 시작되면서 그는 그저 '함께 살기 위해' 운동을 하게 됐다. 아니, 지나 보니 그가 한국인들과 더불어 살고자 했던 노력이 운동이었다. 그는 많은 한국인들과 친구가 됐고, 이주민들과 한국인들 사이에서 소통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어느날 그를 '불법'으로 명명하고 강제로 고향에 돌려보냈다.

네팔에서 처음 그와 통화를 했을 때 나는 한국인과 통화를 하는 느낌이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한국인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그는 한국인일까, 네팔인일까. 그의 삶의 궤적과, 그가 향유하는 문화와, 그의 언어와 사고방식, 그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한국과 네팔 사이의 국경을 넘어섰지만 오직 법과 제도만이 낡은 족쇄로 남아 그의 삶을 구분짓고 있었다.

그 족쇄는 낡았지만 그와, 우리의 삶에서 강력한 힘을 갖고 어떤 억압이 돼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사람들의 신분을 규정짓고 삶의 흐름을 멋대로 바꾸며 복잡한 정체성을 못 박는 법과 국가의 무게에 짓눌렸다. 그가 멀지 않은 미래에 그의 소망대로 한국 땅을 자유로이 밟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가 맺었던 관계들 그리고 운동이 어떻게 자유로이 국경을 넘을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는 숙제가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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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창하는 미누 인터뷰를 마치고 '한국사랑'이라는 식당에 있는 노래방을 함께 찾았다. 밴드활동을 하지 못하는 그에게 노래를 실컷 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공간. 서너 시간동안 그는 한국가요를 열창했다. 나는 그가 의미 있는 노래를 하는 가수라고만 알았지만 새삼 노래를 잘하는 가수라는 것을 느꼈다. 한국가수들의 애절한 사랑노래의 가사가 그가 한국에 대한 애증에 겹쳐져 슬픈 느낌이 들었다. ⓒ 김성민


흩어져 버린 너와의 시간들 아파서 눈물만 흘러
널 사랑했던 내 마음을 네게 말해 주고 싶어
너와 함께했던 시간들 이젠 추억으로 만남아
마지막으로 널 보았던 어두운 거리에서
인사도 못했던 나를 용서해
널 사랑해 네 곁에 가고 싶은데
긴 시간 지나도 난 기다릴 텐데 난 괜찮아
난 견딜 수가 있어 넌 행복해야 돼 날 떠나도
오 너를 다시 만나면 나는 말 할 거야
고마웠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행복해 영원히 널 사랑해
- 스탑크랙다운 < forever >

* 미누가 네팔로 강제추방된 뒤에도 다국적 노동자 밴드 '스탑크랙다운'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노드목탄 #미누 #이주노동자 #스탑크랙다운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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