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상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서평] 그가 뽑은 어린이책 50권 이야기 담은 <책으로 가는 문>

등록 2013.09.02 11:55수정 2013.09.0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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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 ⓒ 현암사

"(헌법) 96조를 먼저 개정하는 것은 사기", "위안부 문제도 각기 민족의 자긍심 문제이기 때문에 분명히 사죄하고 제대로 배상해야 한다", "(아베 정권) 역사감각의 부재에 질렸다. 생각이 부족한 인간이 헌법 같은 것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72) 감독이 지난 7월 18일 쓴 글입니다. 아베 정권에 대한 신랄한 이 비판은 우리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태평양 전쟁 때 일본제국주의군 최신예 주력 전투기였던 '제로센'(零戰)을 개발한 호리코시 지로(堀越二郞)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 영화 <바람이 분다>를 만들었습니다(일본은 7월 20일, 한국은 9월 5일 개봉).

애니메이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야자키 감독이 누구인지 알 것입니다. 그는 '상상력의 거장'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상상력'이란 말에 눈길이 갑니다. 그의 상상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상상력의 거장' 미야자키가 뽑은 어린이 책 50권

<어린왕자>(생텍쥐페리>, <삼총사>(알렉상드르 뒤마), <파브르 곤충기>(장 앙리 파브르), <바보 이반>(톨스토이), <해저2만리>(쥘 베른), <소공자>(프랜시즈 호즈슨 버넷),<하이디>(요한나 슈피리)

어릴 때 읽었거나, 아니면 자녀 중 초중생이 있으면 읽으라고 다그치는 책들입니다. 미야자키 감독 역시 어릴 때부터 이들 책을 읽어왔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책으로 가는 문>(현암사)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키워준 가장 재미나고 감동적으로 읽은 세계 명작 50권을 가려 꼽아 짤막한 독후감을 덧붙여 어린이와 어른들에게 추천합니다.


미야자키는 <어린왕자>는 "처음으로 다 읽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고, <삼총사>는 "통쾌한 모험 활극이라는 이름에 이만큼 걸맞는 책도 없을 것"이라며 "두근두근하게 만든다는 건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이죠"라고 말합니다. <톰소여의 모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유명해서 이 책에 대해 새삼스레 보탤 말은 없습니다. 아직 읽지 않았다면 꼭 한번 읽어보세요. 이 얼마나 자유로운 소년 시절인가요. 그런데 이 책은 무척 어려운시대에 쓰였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책으로 평가되었으니까요. 요즘에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을 테지요. 훨씬 자유로운 시대이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몹시 부자유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 아닌가요."(45쪽)

뜨끔했다. 누구보다 민주주의와 말하는 자유를 강조하는 내가 아이들에게 억압하는 자로 군림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톰 소여의 모험>을 읽고, 아이들에게 억압이 아니라 자유라는 상상력을 불어 넣어주지 않으면 읽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미야자키 감독이 소개한 50권 중 필자가 가장 감동 받은 책은 쥘 베른이 쓴 <해저2만리>입니다. 자유와 바다를 사랑하는 네모 선장과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보여주는 바닷 아래 세상은 아직도 가슴을 쿵쾅거립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잠수함도 심해탐사선도 없던 시대에 쓰였는데도, 바다 밑 여행에 대해서는 이 책이 가장 재미있다"고 합니다. 동감합니다.

책 읽지 않은 일본인들, 왜 읽게 되었을까

미야자키 감독에 따르면 일본도 전전(태평양전쟁)때는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실한 사람이 소설 따위를 읽으면 쓸데없는 것을 배울 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배하자 "사고를 하지 않으니까 이런 어리석은 전쟁을 해서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가치관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분위기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일본제국주의가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기에 이런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책을 통해 상상력이 풍부해집니다. 하지만 이 생각도 조금 후 논박당합니다.

우리나라는 책을 잘 읽지 않는 나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참 '요상'(?)합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책을 읽게 한다는 것입니다. 논술때문이고, 학교에서는 올해 읽어야 할 책 목록을 아이들에게 알려줍니다. 공부와 대학입시를 위해 책을 읽는 나라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야자키 감독의 말을 들으면 이 같은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습니다.

"책에는 효과 같은 게 없습니다. '이제야 되돌아 보니 효과가 있었구나'라고 알 뿐입니다. 그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효과를 보려고 책을 건넨다는 발상은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읽히려고 해도 아이들은 읽지 않습니다. 부모가 열심히 읽으면 아이가 읽지 않는다거나 오빠가 열심이 읽으면 여동생이 읽지 않거나 합니다."(141쪽)

정곡을 찔렀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이 말한 '효과'를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은 눈 앞에 다가온 입시와 성적을 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래 그때 읽었던 책이 바로 이런 의미였구나, 이런 뜻이였구나 무엇보다 내 의식과 삶을 이렇게 지배하고 있었구나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미야자키 감독 생각은 다릅니다. 오히려 부모가 책을 열심히 읽으면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과연 누구 말이 맞는지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린이 문학은 아이들 마음에 응원을 보내는 것 

미야자키 감독은 책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여지 없이 공박합니다. 그는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면서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서라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합니다.

미야자키 감독의 말을 들은 후, 책에 대한 저의 생각을 조금은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어린이문학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인간 존재에 대해 엄격하고 비판적인 문학과 달리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라면서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라는 응원을 아이들에게 보내려는 마음이 어린이문학이 생겨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군요. 아이들에게 책은 위대한 교훈이나, 꿈을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세상에 태어남은 고귀한 것이고, 자신은 필요없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에 심어주어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힘듭니까. 스스로 자기 생명을 놓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책은 희망을 심어주고, 낙심한 심령에 응원하는 것이 어린이 문학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목적임을 어른들 마음에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책 끝머리에 지난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자신이  느낀 소외를 적으면서 책을 끝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어린이문학은 후쿠시마 원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시작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참담한 일이 속속 일어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테지요. 아직 끝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진도 끝나지 않았고, '몬주(쓰루가 시에 있는 일본원자력연구개발기구의 고속증식로)'도 정리되지 않았고, 원전도 재가동하려고 기를 쓰는, 그런 나라니까요. 아무도 현실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157쪽)

오늘(2일) 아침 일본발 외신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를 선언했다고 합니다.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지난 달 아베 정권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이유 중 하나라고 합니다. 아무튼 또 다른 한 거장이 떠납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 어린이들과 어른들 가슴에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몸은 은퇴했지만, 작품과 정신은 영원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책으로 가는 문>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ㅣ 송태욱 옮김 ㅣ 13000원

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3


#어린이책 #미야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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