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뚫린 두개골(가운데)을 중심으로 아래쪽이 팔뼈이고 윗쪽은 다리뼈다. 시신의 다리가 머리쪽으로 접혀 있음을 보여준다.
심규상
뒤이어 머리뼈 아래에서 당시 남한 군인들이 사용한 M1 소총 탄피가 나왔다. 자신의 머리를 구멍 낸 가해자를 증명하려는 듯 시신은 그 물증을 지니고 있다. 뻥 뚫린 머리뼈와 함께 나온 탄피는 학살이 끝난 뒤 다시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에 총을 쏴 확인사살했다는 증언을 뒷받침한다. 내동댕이친 시신의 머리에 다시 총구를 들이댄 것이다.
그로부터 한 시간여쯤 흘렸을까? 앞서 드러난 두개골 아래에서 또 다른 머리뼈가 나타났다. 머리와 머리가 서로 포개져 묻혀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 잠시 후 부근에서 칼빈 소총 탄두가 발굴됐다. 이는 칼빈 소총을 쓰는 경찰이 학살에 가담했음을 보여준다.
지난 25일 오후 유해발굴조사단은 그때까지 드러난 유해를 수습했다. 그리고 26일 오전부터는 유해를 수습한 아래쪽 흙을 파헤쳤다. 땅을 헤치자 또 다른 유해가 드러났다. 발굴 조사단은 겹겹이 묻힌 유해를 보며 망연자실했다. 현재까지 수습한 유해는 대략 10여 구 정도로 추산된다. 발굴 면적은 가로 6미터, 세로 7미터 정도다. 발굴조사단은 층층이 묻혀 있는 형태로 볼 때 수습하지 못한 유해가 최소 10여 구 이상 될 것으로 본다.
하지만 구덩이의 실제 크기는 이보다 훨씬 큰 것으로 보인다. 구덩이의 네 방향 단면마다 유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박 단장은 "구덩이 단면마다 유해가 박혀 있는 것으로 볼 때 구덩이가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모두 발굴하기 전에는 그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구덩이 크기... 구덩이 단면마다 박힌 유해
▲구덩이 네 방향 단면에도 유골이 박혀 있다. 구덩이의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다.
심규상
▲26일 추가로 발견된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고무신
심규상
발굴조사단은 지금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발굴이 끝나는 오는 28일까지 2일 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 대부분이 학생들이어서 개학 이후인 내달 1일부터는 발굴이 어렵다.
김민철 총괄진행(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유해가 겹겹이 묻혀 있어 현재 발굴하고 있는 면적(가로 6미터, 세로 7미터)에 대해서도 일정 내에 발굴을 끝내기가 쉽지 않다"고 밝혔다.
발굴 4일째인 이날 민주노총대전지역본부와 대전 민중의힘,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등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일손을 돕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 강릉대 역사학과 학생 3명은 이날 오전까지 이틀 동안 유해발굴에 힘을 보탰다. 특히 전날 유해발굴에 참여한 고교생 조태민(남대전고 2년)군과 아버지 조윤(42)씨가 나란히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한국전쟁유족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4·9통일평화재단, 포럼진실과정의,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과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대책위원회'(대전지역 19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23일 부터 대전 산내 골령골(대전시 동구 낭월동 산 13-1번지)에서 오는 3월 1일까지 7일 간 일정으로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재소자를 대상으로 대량 학살(1차 : 6월 28~30일 1400명, 2차 : 7월 3~5일 1800명, 3차 : 7월 6~17일 1700~3700명)이 벌어졌다. 당시 희생자들은 충남지구 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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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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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뚫린 두개골 아래엔 M1 탄피... "끔찍해서 못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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