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전체가 하나의 '열린 대정원'

[김천령의 한국 정원 이야기③]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 정원(하)

등록 2018.03.16 15:46수정 2018.04.1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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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풍경 보길도는 예나 지금이나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 김종길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

보길도 부용동 정원은 한 시대의 안목 높은 시인이자 정치가이자 예술가였던 고산 윤선도가 조영했다. 부용동이라는 이름은 고산의 5대손인 윤위가 1748년 보길도를 답사하고 고산의 유적을 기록한 <보길도지>에 나온다.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하여 '부용芙蓉'이라 이름 했다."

<보길도지>에는 "동방의 명승지는 삼일포와 보길도가 최고인데, 그윽한 정취는 삼일포가 보길도에 미치지 못한다"며 "바다 가운데에 있어도 부용동에 들면 산 밖에 바다가 있는 줄 모르고, 비구름이 한 달 내내 덮고 있어도 습한 기운이 없고, 산속에는 범이나 뱀에 상처 입을 걱정이 없고, 온 산이 늘 푸르고 산해진수山海珍羞를 갖춘 섬"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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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풍경 보길도 송시열의 글씐바위 풍경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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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동 전경 동천석실에서 본 부용동은 말 그대로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하다. ⓒ 김종길


고산은 처음 보길도에 발을 디뎠을 때 수려한 경관과 완벽한 풍수 조건에 탄복했다. 곧장 배에서 내려 섬에서 가장 높은 격자봉을 올라서는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 하고 그대로 살 곳으로 잡았다.

고산은 "격자봉에서 세 번 꺾어져 정북향으로 혈전穴田이 떨어졌는데, 이곳이 낙서재의 양지 바른 터가 되는 곳이다"라며 터를 잡았다. 처음 낙서재에 집터를 잡을 때 수목이 울창하여 산맥을 볼 수 없자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매달아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여 터의 고저와 향배를 헤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가장 명당인 혈전에 낙서재를 지었다.

고산은 낙서재에서 주로 생활했다. 사륜거를 타고 매일 낙서재에서 세연지과 동천석실을 다녔다. 그에게 세연정과 동천석실은 개별적이고 고립된 정원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부용동 일대가 모두 하나의 대정원이었다.


그러면서도 개별 정원은 각기 그 특성을 잃지 않고, 부용동이라는 큰 정원 안에 독립적인 정원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부용동은 닫힌 개별 정원이 아니라 하나의 열린 정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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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재 낙서재 소은병에서 본 동천석실(맞은편 산 중턱)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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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석실 낙서재 소은병에서 본 동천석실(확대 사진) ⓒ 김종길


은둔을 넘어 합일의 세계로

윤선도의 부용동 원림을 단순히 은둔처나 풍류처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윤선도는 머무는 곳마다 연蓮이 있는 연못을 조성했으며 연과 인연이 깊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연화방이고, 녹우당 종택이 있는 곳은 연동, 그가 말년을 보냈던 곳은 부용동이다. 연꽃은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를 상징한다. 고산은 성리학적 실천의 방편으로 연을 심은 것이다.

그에게 부용동 낙서재는 학문을 강론하고 거처했던 생활공간이었고, 세연지는 자족을 얻는 일상의 소요와 풍류공간이었으며, 동천석실은 선계에 머물고자 했던 신선공간이었다. 보길도 섬 전체가 인간 세상을 떠난 신선의 섬이라면 낙서재는 유학자의 이상적 생활공간으로, 세연지는 세상사를 잊고 풍류와 예술을 즐기는 곳으로, 동천석실은 천상의 세계로 우화등선하는 곳이었다. 그에게 부용동 원림은 단지 음풍농월의 공간을 넘어 학문을 도야하고 인격을 수양하여 인간의 성품과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도학적 완성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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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수당 곡수당은 낙서재 아래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지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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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수당에서 본 낙서재 곡수당과 낙서재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다. ⓒ 김종길


고산에게 있어 부용동은 은둔의 공간을 넘어 재도약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세연지의 계담 칠암 중 혹약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역경>의 "혹약재연或躍在淵"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도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고산은 이 바위를 '와룡암'이라고도 했는데 와룡선생이라 불리던 촉한의 제갈공명이 때를 기다린 것처럼 언젠가 자신의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며 때가 되면 힘차게 뛰어나갈 것임을 암시했다.

고산이 주로 생활했던 낙서재 뒤에는 소은병과 미산, 혁희대 등 인문적 경관으로 바뀐 자연물들이 있다. 이것들을 보면 당시 선비들에게 학문과 사상의 이상향이었던 주자의 무이구곡을 이곳에 실현하고자 했던 유학자로서의 고산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유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사상과 행적뿐만 아니라 그가 조영한 원림만 봐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그가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한 동천석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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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폭 동천석실에는 석담, 석천, 석폭, 석계, 희황교, 석문 등 인문 경관화된 다양한 자연물이 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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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암 동천석실의 용두암은 두 바위의 홈에 도르래(용두)를 설치하여 건너편 낙서재에서 음식을 넣은 통을 줄에 매달아 날랐던 시설물이다. 산을 오르는 수고를 들 수 있는 시설물이다. ⓒ 김종길


동천석실은 산 중턱에 석담, 석천, 석폭, 석계, 희황교, 석문 등이 있는 신선이 사는 동천복지의 땅으로 천계로 가는 신선의 공간이다. 도교의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고산이 남긴 시문이나 작품에도 도가적 표현이나 도교적 색채가 강한 것이 더러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원을 조성한 여러 기술들에서 그의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면도 볼 수 있다. 고산은 유학을 바탕으로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것을 수용하고 도교적 세계까지 넘나들면서 자연 속 원림 생활을 즐긴 것이다.

고산은 정원을 예술로 승화했다. 그는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문학적 감성, 남다른 안목과 탁월한 자연 친화력의 소유자였다. 아름다운 산수에 정원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시, 음악, 무용, 그림 등 자신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펼쳐 정원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심미적 감흥을 심화시켰다. 또한 당시 선비들처럼 몸은 현실에 머물면서 관념 속에서만 이상을 꿈꾼 것도 아니었다. 나아가 산수에 파묻혀 은둔만 하거나 자연을 노래하고 풍류만 즐긴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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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석실 산 중턱에 있는 동천석실은 신선이 사는 동천복지의 땅으로 천계로 가는 신선의 공간이다. ⓒ 김종길


고산은 직접 터를 잡고 축대를 쌓고 집을 짓는 등 적극적으로 정원을 조성했다. 단지 세상을 잊고자 자연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원을 조성함으로써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자신의 정신적 세계를 자연 속에서 새롭게 완성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고산은 도학자연한 선비들의 태도와는 다른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고산은 보길도 낙서재에서 85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출사와 유배, 은둔으로 점철된 생애에서 자연과의 합일을 꿈꾸었다. <고산연보>에는 1671년(현종12)에 고산을 문소동 옛터에 장사지냈다고 했다. 그의 뜻에 따라 정원이 있던 문소동이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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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지 동백 해마다 이맘때면 세연지는 온통 동백꽃이다. ⓒ 김종길


국가명승 제34호 윤선도 원림 관람법
고산 윤선도 당시의 주요 생활공간은 낙서재였다. 지금처럼 세연정이 부용동 풍경의 중심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부용동을 오면 대개의 사람들은 볼거리가 있고 잘 정돈된 세연정을 얼핏 본 후 곡수당과 낙서재까지 와서 휑하니 둘러본다. 건너편 산 중턱에 동천석실이 보이지만 왠지 오르기에는 귀찮다. 멀리 눈동냥으로 대신하고 그냥 발길을 돌린다.

잠시 고산이 살던 시대를 상상해 보자. 부용동 정원을 제대로 즐기려면 고산이 그랬던 것처럼 낙서재를 제일 먼저 찾아야 한다. 이곳에서 하릴없이 한참을 소요한 후 지루해지면 세연정을 찾아 풍류를 즐기며 세상사를 잠시 잊는다. 그러다 밀려드는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움을 피하고 산책도 할 겸 동천석실로 오른다. 동천석실에 올라 탈속의 경지를 맛보니 그제야 부용동 정원이 몸으로 들어온다. 그러려면 아침 일찍 낙서재에서 소요하다 낮에는 세연정으로 자리를 옮겨 보내고 해질 무렵에 동천석실을 찾는 것이 좋다. 부용동 정원은 단지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전모를 알 수 없다. 오로지 내가 곧 윤선도가 되어 정서의 환기와 심화를 통한 내면의 일체감을 느낄 때만이 나의 정원으로 다가온다.

세연정에 올라 뱃놀이와 당시의 풍류를 상상하거나 어부사시사를 나지막이 불러보는 건 어떨까. 상류에서부터 연못을 한 바퀴 돌며 산책을 즐겨도 좋다. 칠암에 앉아 낚시하는 척해도 좋고, 물끄러미 연못을 바라봐도 좋다. 아 참, 옥소대에 올라 그 옛날 황원포 바다는 꼭 보는 게 좋다. 그도 아니라면 숲 속에 들어가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어도 좋다. 유튜브로 <어부사시사>를 듣는 건 또 어떤가. 송골매의 <어부사시사>도 좋고 임웅균의 <어부사시사>도 좋다. 칸타타 버전도 있으니 입맛대로 들어보자. 그저 빈둥거리며 정원을 소요하는 것, 그것이 최상일 수도 있다.

해질녘에는 반드시 동천석실로 가자. 예전처럼 차를 끓이고 마실 수는 없더라도 바위에 앉아 부용동 일대를 내려다보거나 돌 연못에 비친 하늘에 언뜻언뜻 흘러가는 구름을 보라. 신선경이 멀지 않다. 날이 어둑해지면 낙서재 귀암에서 고산처럼 달이 뜨기를 기다려 달 놀이를 하면 또 어떤가.

부용동은 이른 아침이나 해질녘에 찾으면 더욱 좋다. 부용동 여행은 적어도 꽃 피는 아침에 시작하여 달 뜨는 저녁에야 마치는 게 좋다. 기왕이면 하룻밤을 묵는다면 더욱 좋다.

덧붙이는 글 ※ 이번 기사는 보길도 부용동 정원 기사 세 편 중 마지막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봄꽃이 아름답게 핀 한국을 대표하는 명원 소쇄원을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할 예정입니다.
#부용동원림 #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 #세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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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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