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단이씨의 유년시절 사진. 단이씨 엄마 표현으로는 "부안 시골에 살던" 단이에게, "도시에서나 살 수 있는 옷과 신발을 사다 나른 것"은 모두 이모·삼촌들이었다고 했다.
이주연
딸, 단이씨가 떠났다. 엄마 나이 만 스물여섯, 아빠 나이 만 서른 둘에 낳아 스물 다섯해 키운 딸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단이씨는 2022년 10월 29일 친구와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5남매 중 맏이인 엄마가 낳은 첫째 딸. 첫 조카인 단이씨를 이모 둘과 삼촌 둘은 닳게 예뻐했다고 한다. 엄마 표현으로는 "(전북) 부안 시골에 살던" 단이에게, "도시에서나 살 수 있는 옷과 신발을 사다 나른 것"은 모두 이모·삼촌들이었다. 막내 삼촌은 군대에서 휴가 나올 적마다 단이를 보러 와 목마를 태우고 다녔다고 했다. 단이씨를 보내는 49재 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브랜드 옷을 장만해 함께 태워준 것도 큰이모였다. "딸한테 비싼 옷 한 벌 못해준 게 한이 된" 언니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엄마는 휴대폰에 단이씨를 '우리 공주'라 저장해뒀다. 엄마는 '더더더'를 말했다. "예쁜 거 더 많이 사주고, 용돈도 더 많이 주고, 더 많이 안아 주고, 더 사랑한다고 얘기해줄 걸..." 하는 후회다.
무뚝뚝한 아빠도 표현은 못했지만 딸을 아꼈다. 변산에서 가게를 해 부안에 사는 가족들과는 주말에만 만났다. 짧게 볼 수 있는 딸이 아까웠다. "내내 안고만 댕겼다"고 했다. 단이씨 얘기만 나와도 손수건을 눈에 가져다대던 엄마는 옆에서 "이이는 저보다 단이가 좋다 했어요"라며 슬몃 웃었다. 아빠는 다같이 모여 밥을 먹을 때 수시로 젓가락을 내려놨다고 했다. 아빠만의 사랑법이었다.
"생선이 나오면 가시 싹 발라주고, 고기가 있으면 한 점이라도 더 먹으라고 덜 먹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내가 입이 짧은 줄 알아. 내가 먹어봐서 맛있으면 일부러 안 먹었거든. 우리 단이는 뭐든 잘 먹었어요. 육고기도 잘 먹고 바닷고기도 잘 먹고 과일도 잘 먹고. 맛있게 먹는 거 보면 예뻐서 난 안 먹었지요."(아빠)
딸이 직접 지은 냉장고 속 밥 먹으며 눈물 쏟은 엄마
가족들의 사랑을 담뿍 받은 단이씨는, 단단한 사람이 됐다. 미래를 그리고, 스스로 결정해 준비했다. 2022년 8월에만 해도 단이씨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대전에서 보건대를 졸업한 단이씨는 개인병원에서 3년 남짓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 체력적으로 힘에 부쳐 일을 그만두고 알아본 것이 영상편집 일이었다. "학원에 다니려면 생활비가 있어야 한다"며 600만 원 가량을 바짝 모았다. 큰이모가 사는 인천에서 자취를 시작한 단이씨는 8월부터 서울 구로에 있는 영상편집 학원에 다녔다.
"우리한테 부담 안 준다고 돈을 모았나보더라고요. 집에서도 도와줄 수 있는데... 자립심 키워준다고 그리 키웠는데 후회돼요.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으니까요."(엄마)
이미 '어른'이 됐지만 아빠에겐 마냥 아이 같던 딸. 그 딸이 '철이 들었다'고 생각한 건 한 번 안 하던 안부 전화를 때때로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1년 전부터인가 갑자기 전화가 오더라고요. 처음엔 뭔 일 생겼나 하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근데 '밥 먹었어?', '밥 잘 챙겨드셔' 이러는 거예요. '우리 딸 철 많이 들었네' 했어요, 내색은 안 했지만." (아빠)
"어깨에 이고 다니던" 딸은 어느새 20대 중반을 지나왔지만 아빠는 다 큰 딸과 술 한 잔을 못 나눠봤다고 했다. 그게 사무친다고 했다. '나가서 한 잔 할까' 소리가 차마 입 밖으로 안 나왔다고 했다.
"아직 어린데... 싶어서 얘기를 못 꺼내고 있었어요. 그때 밖에 기회가 없었는데..."
엄마는 "아이 같던 단이가" 손수 지은 밥을 울면서 먹었다.
"인천 자취집을 정리하는데 냉동고에 단이가 지어놓은 밥이 요만큼씩 하나하나 포장돼있더라고요. 단이가 한 거라서 일부러 가져와서 (단이) 큰이모랑 나눠 먹었어요."
친구의 사랑 "가족같은 친구가 아니라, 친구같던 내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