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이응준은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wiki commons
이응준은 1914년 5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이래로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일제의 군인으로 일본에 충성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조선 출신임에도 일본군 대좌(대령)까지 올랐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본 육사 동기인 지청천(훗날 광복군 총사령)이 1919년 일본 군적을 버리고 중국으로 탈출한 것과 달리 이응준은 일본군 장교의 신분에 안주하고 반평생을 일제에 충성하는 직업 군인이 되었다"면서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은 갖고 있었다고 보이지만 군인으로서 충성해야 할 국가에 대한 관념이 결여돼 결국 일본제국에 충성하는 조선출신 일본군 장교로서 그의 전반기 생애를 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라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된 일본군 대령
이응준은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했다. 함경남도 원산항에서 수송 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개인적으로 탈출해 서울에 들어왔다. 11월엔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전국조선임시군사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미군정과 긴밀히 접촉해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국방사령관 고문으로도 위촉됐다.
이응준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특히 김백일, 백선엽, 김홍준 등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군인들을 미군정 운영 군사영어학교에 보낸 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이력으로 인해 묘비에 '대한민국 국군의 아버지'라고 쓰인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했다"라고 명시돼 있다. 이는 곧 국군의 뿌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 어디에도 이응준과 같은 일본군 출신이 대한민국 국군을 창군했다는 말은 없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충칭에서 김구 주석과 지청천, 이범석 장군 등이 중심이 돼 조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 국군이다. 1942년 약산 김원봉 장군의 조선의용대를 흡수한 뒤 정규군으로서의 면모를 만방에 과시했다. 한국광복군 사령관은 이응준의 일본 육사 동기로 활동하다 독립군이 된 지청천 장군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