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 안장 친일파] 송석하 묘지송석하는 간도특설대 창설에 가장 큰 영향 끼친 인물
친일파 송석하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송석하는 장군제1묘역 상단 좌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김종훈
1948년 육사를 졸업한 지 2년도 안 된 시점에 송석하는 육군 소령으로 특진해 제2연대 부연대장이 됐다.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1개 대대를 이끌고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1949년 8월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한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20사단장이 돼 참전했다. 1955년 1월 별 두 개인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6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해 1955년 1월 육군 소장이 되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1961년 육사 동기인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 송석하는 한국국방연구원 원장에 임명됐다. 1963년 송석하는 전역과 동시에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상임위원 겸 사무국장으로 임명됐다. 1965년 민방위개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69년에는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1972년에는 재향군인회 안보위원장도 맡았다. 1999년 1월 14일 만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틀 뒤인 1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상단에 안장됐다.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작성된 공식보고서에 "만주국군 출신 송석하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19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라고 평가했다.
특별법 2조 10호에는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가, 19호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가 각각 명시돼 있다.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1999년 1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안장된 송석하는 정부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송석하 (1915~1999) - 만주국 황제에게 금시계 받은 조선인 1937년 봉천군관학교 5기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만주국 황제가 주는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뒤 보병으로 활동했다. 간도특설대 창설 후에는 기관총박격포중대에서 복무하면서 "간도특설대의 주요 간부로 항일무장부대를 공격하고 무고한 민중을 탄압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간도특설대는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시작해 만주 거주 조선인 친일파의 거두로 자리매김한 이범익이 일본 측에 제안해 만들어진 항일무장세력 탄압 특설부대다.
해방 후엔 김백일, 김홍준, 신현준, 김석범, 백선엽, 정일권 등 여타의 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처럼 대한민국 국군으로 신분을 바꿨다. 1955년엔 육군 소장까지 올랐다. 육사 동기인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엔 한국국방연구원장에 임명됐다. 이후에도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상임위원, 재향군인회 안보위원장 등 승승장구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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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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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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