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 안장 친일파] 김석범 묘지우리가 잘 몰랐던 해병대 사령관 김석범의 비밀
친일파 김석범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석범은 장군제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래줄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김종훈
해방 후인 1946년 김석범은 대한민국 해군으로 보직을 바꿨다. 이후 해군통제부 참모장과 방위사령관 등을 지내다 한국전쟁 중 해병대로 전과했다. 1953년부터 친일파 신현준에 이어 해병대 2대 사령관으로 4년 동안 재임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김석범이 해병대로 전과하는 데는 봉천군관학교 동기이자 간도특설대 전우인 신현준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해병대 사령관을 마친 김석범은 국방대학원과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을 거쳐 1960년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재향군인회 부회장과 국군 장성들의 예비역 모임인 성우회 부회장을 지냈다.
1998년 2월에 사망한 김석범은 국립대전현충원 제1장군묘역 최상단 바로 아랫줄에 안장됐다. 그의 무덤 옆에는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세력을 소탕하던 김창룡이 잠들어 있다. 1949년 6월 김창룡이 방첩대장을 할 때 그의 직속 수하인 안두희가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공식보고서에 "김석범은 만주국군 장교로 임관한 이래 일본의 패전 때까지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로 복무했다"면서 "특히 간도특설대 주요 간부로 만주와 중국 관내에서 항일무장부대 공격에 참여했고, 정보반 주임을 맡아 무고한 민중을 탄압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했다.
"김석범의 이러한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19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1998년 2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김석범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김석범 (1915~1998) - 창씨개명만 하지 않은 잔인한 간도특설대원 1915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봉천군관학교를 거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졸업성적 우수자로 발탁돼 일본 육사에 입학, 이후 간도특설대 정보반 책임자로 활동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정보반의 목적은 팔로군, 지하공작원, 민병의 활동과 군중의 사상동태를 정찰해 (간도)특설대가 소탕활동과 항일군민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것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40세 좌우의 백성을 붙잡아다 사격 과녁으로 삼았다. 놈들은 여자는 만나는 족족 강간하고 좋은 물건은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해방 후엔 대한민국 해군으로 변신, 해병대 사령관,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을 거쳐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했다. 1998년 사망 후 국립대전현충원 제1장군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무덤 옆에는 항일무장세력을 소탕하던 김창룡이 잠들어 있다. 묘비엔 "조상에 대한 신의로 창씨개명 아니한..."이라고 적혀있으나 '창씨개명만 하지 않은' 친일파였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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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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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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