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4 11:16최종 업데이트 20.04.0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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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낙준 묘지민족을 붙들고 살리기 위해 '친일' 을 택했다는 사람, 백낙준 친일파 백낙준의 묘는 국가유공자1묘역에 자리해 있다. 유공자1묘역은 이승만 대통령 묘소 바로 뒤쪽으로 친일파 김백일과 신응균이 잠든 장군1묘역으로 가는 길목이다. 김종훈
 
국립현충원에 잠든 11명의 '국가공인 친일파' 중 군인이 아닌 인물이 하나 있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낸 백낙준이다.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자리한 그의 묘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전쟁을 앞뒤에 두고 나고 자라고 일하는 동안 민족을 붙들고 살리는 방도가 교육에 있음을 알고 일생 사업으로 교육에 종사하여 왔다."
   
 
국가공인 친일파 백낙준한국학중앙연구소
 
일제강점기 백낙준의 삶은 묘비에 새겨진 말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백낙준은 일제강점기부터 교육자이자 언론인, 종교인으로 활동하며 설교, 사설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특히 <기독교신문>의 편집위원과 이사로 활동하며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1942년 5월 20일 백낙준이 직접 작성해 <기독교신문>에 실은 설교문 '내 아버지의 집' 중 일부다.
 
"우리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다. 이러한 성전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에 생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자기 나라가 이 세상 나라였다면 그 신하가 싸울 것이라 했다."

백낙준이 직접 편집과 설교, 사설을 써가며 자신의 친일 행각을 알린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조선기독교협회에 의해 창간됐다. 4월 29일은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로, <기독교신문> 창간 10년 전인 1932년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한 날이기도 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백낙준은 1942년 '종교보국'을 사명으로 창간된 기독교 신교 각파의 합동기관지 <기독교신문> 이사와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면서 황민화 정책과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지면을 편집하고 직접 설교와 사설을 썼다. '미영타도' 좌담회에 참석하고 전쟁협력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반복적으로 발표하는 등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적극 협력했다."
 
1943년 1월 당시 매일신보에 실린 일본 항공기 관련 기사공훈전자사료관
 
1941년 12월 2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애국기헌납운동' 관련 기사. 백낙준은 지대한 활동을 보였다.공훈전자사료관
    
백낙준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헌신적으로 부역하기 위해 '조선예수교 장로교도 애국기헌납기성회'라는 단체의 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42년 9월 23일 <기독교신문>에는 이 단체에서 구입해 일제에 헌납한 해군전투기 '조선장로호' 명명식 장면이 기사로 실렸다. 이 자리에는 목사 백낙준도 참석했다. 
 
"남으로 북으로 종횡무진의 활약을 하고 있는 우리 육해공군의 분투와 노고에 보답해, 총후 37만 장로교도 일동은 우리 무적해군에 해군기 1대와 병기 2정을 헌납한 사실을 누차 보도했다. 이 보국호(조선장로호)의 명명식은 '대공의 제전'에 전개된 항공일의 의도 깊은 9월 12일 오후 1시부터 경성 함태영 목사, 백낙준 목수 외 80여 명 장로회 대표들이 열석하고, 군관민 내빈 5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경성운동장에서 엄숙히 거행됐다."

독립운동가 서훈 심사위원이 된 친일파 
 
1951. 부산, 한 초등학교 어린이 대표가 교과서 용지를 원조해준 미국의 원조기관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오른쪽 끝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장관)NARA
 
해방 후 한 달 뒤인 1945년 9월 백낙준은 큰 어려움 없이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김성수, 김활란 등과 함께 활동한다. 이어 10월부터는 경성대학(서울대학 전신) 법문학부 부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부터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1946년 8월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자 초대 총장이 됐다.  

1950년 5월부터 문교부 장관을 맡아 1952년 10월까지 재임했다. 이후 국민사상지도원 원장과 연희대학교 이사장을 맡았다. 1953년에 다시 연희대학교 총장으로 복귀, 1957년 1월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대가 통합해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1985년 1월 8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을 지냈다. 


1968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가 열리자 박정희 정권은 백낙준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기준으로 조선사편수회 출신 신석호, 이병도,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회부장 출신 홍종인 등도 백낙준과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박정희 정권 때 활동했다. 

2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친일행적
 
1943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백낙준 관련 기사매일신보 캡처본 재촬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담긴 백낙준의 친일행적은 A4용지 24장에 이른다.

1940년대 교육과 문화, 언론, 종교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백낙준의 친일 족적이 그만큼 방대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백낙준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라고 평가했다.
 
"백낙준은 평남 신성학교와 중국 천진신학서원을 거쳐 미국 파크대학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신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연희전문교수로 재직하며 문과과장을 지냈다. 194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예수교 장로회 포교자로 허가를 받은 뒤 각종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했다."

백낙준은 '국가사회 유공자'라는 이유로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다. 2009년 정부가 '친일파'로 결정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누워있다. 현행 상훈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명시됐다.
 

백낙준 (1896~1985) -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이 된 친일파, 연세대 총장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다. 이러한 성전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에 생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낸 백낙준이 직접 창간한 <기독교신문>에 실은 글이다.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창간했다. 10년 전,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성공시킨 날이기도 하다. 해방 후엔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김성수, 김활란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57년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1968년엔 친일파 홍종인 등과 함께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국립현충원 11명의 국가공인 친일파 중 유일하게 군인이 아닌 인물이다. 그의 친일행적 기록은 A4용지 24쪽에 달한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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