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홍석 묘지친일파 묘비에 적힌 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친일파 백홍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백홍석은 장군제1묘역 중턱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김종훈
백홍석 역시 여타의 일본군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에서 활동한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통위부(현 국방부) 자문역에 역임된 백홍석은 1948년 대한민국 육군 특별부대사령관(대령급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당시 백홍석이 거친 특별훈련 과정은 1주일이었다. 예비군을 포함해 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그가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신분을 바꾸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1949년 7월 백홍석은 정일권 준장, 신태영 준장 등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공훈기장'을 받았다. 당시 백홍석과 함께 공훈기장을 받은 고위직 장교 중에는 채병덕도 있었는데, 그는 일본 육사 27기를 나와 일본군 중좌로 해방을 맞이한 인물이다. 백홍석의 사위였다.
해방 후 장인 백홍석이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을 때 스물다섯 살 어린 사위 채병덕은 이미 최고위급 장성인 대한민국 육군 소장이었다. 채병덕은 해방 후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마친 뒤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중대장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됐다. 이후 통위부 총참모총장 등을 거쳐 1948년 12월에 육군 준장에, 두 달 뒤인 1949년 2월에 육군 소장에 올랐다. 동시에 대한민국 육해공군총사령관에 임명되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초반 안이한 판단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1950년 하동전투에서 전사했다.
백홍석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서울지구 병사구사령관으로 재직했고, 1953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병무감을 거쳐 1954년 동부지구 경비사령관, 1955년 대한민국 육군 제33예비사단(현재의 제17보병사단) 단장을 역임했다.
백홍석은 현역 군인이던 1952년 2월, 재향군인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특이한 점은 제대 군인들의 친목과 권익을 위해 만들어진 재향군인회가 한국전쟁 중에는 백홍석과 백승훈(2대 회장) 등 현역 장성들이 회장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종료 후인 53년 7월부터는 3대 회장인 신태영을 시작으로 예비역 장성출신들이 재향군인회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백홍석은 1960년 10월 만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현충원 밖에 안장됐던 백홍석은 2003년 3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중턱에 위치한 176번 무덤으로 이장됐다. 보훈처에 따르면 국립묘지로의 이장은 이장시기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다. 유족의 희망에 따라 원하는 시기에 이장 절차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