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12 06:42최종 업데이트 24.06.12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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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부모가 사라진 딸의 손을 우리 부부가 잡았다. 김지영
 
내겐 아내와 함께 낳은 자식이 둘 있다. 올해 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결혼한 이듬해 아내가 배로 낳았고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은 18년 전 시골에 귀농했을 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입양으로 낳았다.

입양을 보통 가슴으로 낳는다는 표현을 하는데 배로 낳은 아들과 입양한 딸을 키우면서 알 수 있었던 삶의 진실은 배든 가슴이든 일단 낳고 기르다 보면 그게 어느 쪽이든 자식은 (각자가 지닌 우주적 차원의 개별적 다름과 별개로) 그냥 다 똑같은 자식이라는 사실이다.

배로 낳은 아들과 입양으로 낳은 딸

우리 가족이 행복한 삶의 무지개를 쫓아 서울에서 시골로, 시골에서 섬으로, 다시 육지 고향으로 갔다가 또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지난한 12년 동안의 과정이 있었다. 내 나이로는 41살에 시작해서 53살에 다시 서울로 왔고 지금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나 58살이 되었다. 생후 27일 된 딸을 입양했을 당시 내 나이는 마흔두 살이었다.


한곳에 머물며 많아야 한두 번 이직으로 그치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인생행로를 한참 벗어난 삶을 살았다. 가족관계도 혈연 만이 아닌 입양가족이라는 다소 특별한 구성을 했다. 내가 다소 특별하다고 표현한 입양은 내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인식하고 소비하는 입양을 말한다. 비혈연을 전제로 한 입양은 아직 우리 사회 안에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선택이다. 있는 그대로의 입양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예컨대 딸은 우리 가족 안에서 공개입양으로 자랐는데 사람들은 굳이 어린 나이에 입양 사실을 말해서 아이에게 상처를 주느냐고 나무란다. 입양 당사자에게 입양사실은 생물학적 정체성의 근원이기 때문에 늦게 알면 알수록 배신감과 상처가 비례해서 커지는 이치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쉽게 생각해서 아이가 사리판단이 되는 사춘기 이후에 잘 설명하면 쉽게 납득하는 줄 안다. 하지만 한 인간에게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로부터 태어났는지는 가장 근원적인 물음임과 동시에 평생의 질문이다. 그리고 이미 앞선 경험으로 사춘기 전후로 입양 사실을 말했다가 집안이 사달나는 사례는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납득되는 이성적 영역이라면 입양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선택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 아무튼 내 딸은 어릴 때부터 입양 사실을 알았고 입양가족 모임을 통해 자기처럼 입양된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았으며 무엇보다 그 사실이 부모인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앞에서도 괄호 안에서 이야기했지만 '각자가 지닌 우주적 차원의 개별적 다름'과는 별개다. 굳이 이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부인할 수 없이 인간은 DNA로 모든 생물학적 형질이 완성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딸에게는 나와 아내의 DNA가 없다. 

기질, 성격이나 성향, 외형적으로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나 스머프처럼 작달막한 우리 부부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기다란 키와 전혀 정보가 없는 가족력 때문에 우리가 가끔 서로 혼돈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 사실이 우리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흠집내지는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서로 잘 투명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양을 해도 가족 안에서 자라면 모든 게 부모가 원하는 방식으로 동일시된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오만이다. 모든 관계는 상대적이다. 가족도 서로 다른 각자의 상호관계다. 혈연이든 아니든 마찬가지다. 사람이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태어날 때 가진 유전적 형질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가족이나 성장환경이 중요한 이유는 그 형질의 발현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매우 중요한 그 변수가 바로 부모의 역할이다. 

다만 우리 가족은 의외의 경우다. 우리 부부가 딸을 위해 그런 부모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딸이 내 삶과 우리 가족 이주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입양이 딸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는데 딸이 오히려 나와 가족의 운명을 바꾸었다. 김지영
 
딸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내 나이로 41살부터 53살까지, 서울을 떠났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12년 동안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실패와 좌절을 다 감수하고도 남을 소중한 딸을 얻었는데 그 딸이 나에게 글을 쓰게 만들었고, 우리를 한 번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다는 서울로 오게 만들었고 또한 나를 택시 운전사로 만들었다. 

딸을 입양하고 내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족이 하나 늘어난 것도 큰 변화였지만 우리 사회에 입양을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을 안타깝게 목도하면서 아빠로서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건설목수를 하면서 섬에 살 때였다. 내가 경험한 입양과 사회에서 인식하는 입양의 차이가 아이가 커갈수록 심각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입양은 혈연만 다른 평범한 가족인데 사회에서 입양은 피가 다른 비극적 서사로만 소비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입양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늘 있어왔고 그들에게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실재하는 입양을 보여주고 싶었다. 

목수 일 하는 틈틈이 비행기를 타고 육지를 오가면서 다양한 입양가족을 만나 인터뷰해서 오마이뉴스에 연재 글을 썼고 글을 묶은 책이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입양을 경험한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담은 글이 세상을 바꾸진 못해도 그 글을 읽고 입양한 사람이 있다면 부모가 사라지고 없는 한 아이의 세상은 바꾼 셈이다.
 
딸이 커갈수록 실제하는 입양과 사회에서 인식하는 입양의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입양가족을 만나 인터뷰해서 글을 썼고 연재 글을 묶은 책이 나왔다. 오마이북

책이 출간되고 이듬해 우리는 오랜 유목 생활을 마감하기로 하고 7년을 살던 제주를 떠나 고향에 정착했는데 일 년 만에 다시 이삿짐을 싸서 서울로 와야 했다. 당시 입양법 재개정 문제가 터지면서 입양가족 입장에서 입양이 억압당하고 사회에서 배제되는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무엇보다 당장 입양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였다. 

입양가족들이 공분해서 모여들었다. 단체를 만들어 대응하려는데 마땅한 인물을 찾는다는 게 나였다. 그렇게 12년 만에 서울을 떠나기 전에 살던, 반경 500미터 이내에 아이들 외할머니와 이모네와 외삼촌네가 이웃해 의지하며 살고 있는 서울 그 동네에 짐을 풀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와서 제 운명이 바뀐 딸이 가족 전체의 운명을 바꾸었다. 이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때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을 한 결과였다.

딸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일들

5년 동안 단체 사무국장과 국회의원 입법보조원으로 일을 했다. 국회의원실에 소속되면서 국회로 출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입양의 출발은 부모 없는 아이들(요보호 아동)이다. 그 아이들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떻게 보호되며 어떤 절차를 거쳐 어디로 가서 사는지를 살펴봐야 했다. 

의원실을 통해 정부와 기관으로부터 관련 자료를 받아 분석하면서 망연자실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모 없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야 할 국가와 지자체가 정작 해야 할 일을 방기하고 있었다.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국가는 없었다. 

요보호 아동 업무는 정부가 정책 결정을 하는 지방이양사업이다. 부모 없는 아이가 발생하면 이 아이를 우선 임시 보호시설에서 보호하게 된다. 보호 기간 동안 해당 지자체에서는 아동복지심의위원회를 열어 시설, 입양, 가정위탁 등으로 보호 결정을 하고 아이는 결정에 따라 보호조치가 완료되는 체계였다. 
 
국회의원실 책상풍경. 일년 육개월을 투잡을 했다. 낮엔 국회에서 밤엔 택시에서 일을 했다. 하루 동안 머리 쓰는 일과 몸 쓰는 일을 동시에 했다. 김지영
 
내가 자료를 검토했던 2022년을 기준으로 220여 개 넘는 전국 지자체를 전수조사한 결과 일 년 동안 위원회가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지자체도 있었고 대부분의 위원회는 일 년에 한두 차례 사후 승인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그쳤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제 삶의 모든 것이 걸린 운명적 결정이 지역 담당 공무원이 누구냐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리게 되는 현실이었는데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할 입양보다는 간단하게 민간시설로 보내면서 업무를 종결시키는 방식이 오랜 관행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억장이 무너지는 현실이었다. 

그 아이들이 시설로 들어가면 통계적으로 10년을 보육원 아이로 자라는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으로 장기적인 기간이다.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은 위탁가정 중심의 탈시설이거나 있는 시설도 단기간의 임시보호처로만 활용하는 수준이다. 

입양정책이나 법률문제 때문에 일을 시작했는데 부모 없는 아이들에 대한 우리나라의 참담한 보호 환경을 알게 되었다. 지난 5년 동안 엉망으로 돌아가는 요보호 아동에 대한 국가와 지자체의 보호체계를 기사를 써서 알리고 국회 토론회를 통해 대안을 모색하고 구체적인 정책 방안을 정부와 해당 지자체와 머리를 맞대고 만드는 한편 입양법이 우여곡절 끝에 여야 합의로 통과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시설 중심의 아동보호체계는 한국에서 여전히 공고하다. 한국전쟁에서 시작된 근대 아동보호체계의 중심에는 늘 시설이 있었다. 많은 인력이 종사하고 있고 다양한 이익 관계가 얽혀있다. 

권한은 행사하고 책임은 회피하는 우리나라 공조직 문화도 아이들을 희생양 삼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안타깝지만 국회의원의 힘을 빌려도 소용없는 게 관료사회의 힘이었다. 일개 활동가이면서 입법보조원이었던 내가 가졌던 무력감은 언제나 그 문턱 앞에서였다.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한 완전한 돌봄이 있기까지 우리 사회가 넘어야 할 산은 아직도 첩첩이었다. 

그러다가 가끔 정말 아이들에게 대한 안타까움이 눈에 그렁그렁한 헌신적인 사무관을 몇 명 만난 경험은 내겐 참으로 귀한 순간이었다. 그들로 인해 극적으로 운명이 바뀐 아이들이 내가 목격한 것만도 여럿이었다. 

딸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내 역할은 여기까지 라는 선언과 동시에 그 일을 마무리한 때가 작년이었다. 그리고 택시 운전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직전 일 년 육 개월 동안 아침엔 국회에 출근하고 밤엔 택시 운전을 하는 적응 기간을 거친 후였다. 늘 부족한 잠과 과중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택시가 나와 내 가족을 책임질 만한 직업인지를 따져볼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가 따져봐야 할 것들 중에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은 크게 안중에 없었지만 아직 주민등록증도 없는 고등학생 딸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런 딸만 아니라면 노후의 내 노동이 그렇게 무겁진 않았을 테지만 그게 원망으로 비화하지 않는다. 자식의 성장에 자신의 노동이 깃들어있음을 부모들은 기쁘게 받아들인다. 어떤 노동도 자식을 위해 마다하지 않을 이유가 된다. 

오래전 나는 부모가 사라진 내 딸을 입양하면서 단 한 번 딸의 운명을 바꾸었다. 하지만 함께 살아오는 동안 딸은 나와 가족의 운명을 여러 번 바꾸었다. 지나고 보니 그건 항상 좋은 쪽을 향해 있었다. 부인할 수 없이 출발은 입양이었다. 


세상의 모든 소린이에게 - 사랑의 시작, 입양을 인터뷰하다

김지영 지음, 오마이북(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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