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17 06:59최종 업데이트 24.10.17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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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편집자말]
아기와 손.pexels

정훈님, 저는 지금 산부인과 입원실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10월 11일 세상이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떠들썩하던 날 제 딸이 지구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이날을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아이와 배우자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모든 미디어에서 한강 작가와 관련된 일화들을 쏟아내는 바람에 토막토막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사로잡은 건 한강 작가가 자전소설 <침묵>을 통해 밝힌, 그가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이야기였습니다. 한강 작가는 아이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아이 낳기를 망설이는 부부들도 비슷한 마음일 겁니다. 자산 격차, 기후 위기, 차별과 폭력 앞에 아이들이 잘 견딜 수 있을까, 우리가 자식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준비되어 있을까라는 불안입니다. 우리부부도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설 속 남편의 달변은 그야말로 우리가 가진 불안을 살살 녹여버렸습니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아. 여름엔 수박도 달고, 봄에는 참외도 있고, 목마를 땐 물도 달잖아. 그런 거, 다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빗소리도 듣게 하고, 눈 오는 것도 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조그마한 아이의 얼굴을 보고 또 보면서 가족이란 무엇일까? 라는 고민을 하던 차에 얻은 재밌는 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낭만적인 이야기로 담을 수 없는 다양한 가족이 존재합니다.

<열무와 알타리> 유영 작가의 죽음

웹툰 <열무와 알타리>카카오웹툰

불안을 녹이는 달콤한 이야기를 듣고, 웹툰 <열무와 알타리>의 유영작가가 떠올랐습니다. 웹툰 제목 <열무와 알타리>는 작가의 쌍둥이 아들 이름입니다. 쌍둥이 중 한 명인 열무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영작가는 쌍둥이와 두 고양이를 남편과 돌보면서 겪은 일들을 웹툰으로 그렸습니다. 그는 2022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양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동정이나 배려가 아닌 함께 어울리는 삶으로 미디어에 노출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29화를 좋아합니다.

"어쩌면 나는 행복에도 정답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매 순간 오답 같았던 내 인생이 불행했었다. 나는 행복의 정답지를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행복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위해 커피를 내려주는 너의 모습(남편)에 행복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뺨에 가장 아끼는 돌고래 스티커를 붙여주는 너의 모습(열무)에 행복하기로 마음먹었다. 느리지만 천천히 커가는 너의 모습에...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너의 미소에 행복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강 작가의 배우자가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달달한 수박을 먹이는 행복한 미래를 묘사했다면, 유영작가는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의 모습 그대로가 달달한 수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것은 수박 농사를 짓는 것보다 힘든 일입니다. 혼자는 힘들어서 동료를 찾지만, 동료들과 함께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사회적 차별이 존재합니다. 이 장벽을 바꾸기 위해 조직을 만든 부모들도 있습니다.

"부모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 평범한 부모들의 특별한 어깨동무가 있는 곳!"이라는 슬로건을 건 전국장애인부모연대입니다. 조직이 결성된 2003년부터 지금까지 장애아동을 돌보는 일에 국가도 힘을 보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 가고, 지하철을 타고,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일상생활을 할 때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사회의 허락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우리'에서 항상 추방당하고 배제당합니다. 장애를 가진 국민을 돌보는 일을 가족에게만 맡겨놓는다면 '가족'은 '행복'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행'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열무와 알타리 34화에서는 장애아동 재활병동에서 부모들끼리 수다를 떨면서 "육아는 그냥 내 무덤에 관뚜껑이 닫혀야 끝나는 거야~"라고 자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하루 앞둔 지난 4월 19일 오후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주최로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전국장애인부모연대 420 전국집중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발달장애인법 전부개정!"과 "특수교육법 전부개정!"을 요구하며 "노동권, 건강권, 자립생활권, 교육권 쟁취!"를 결의하고 있다.이정민

지난 9월 23일 새벽 유영 작가는 잠을 자던 중 사망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쉬이 떨어지지 않을 발걸음이었을 겁니다.

"아이의 장애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두렵지는 않다." 유영 작가가 영국에 사는 친구로부터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유영 작가의 죽음으로 열무와 알타리 웹툰은 9월 12일에 올라온 245화에 멈춰있습니다. 다음화의 이야기는 웹툰이 아니라 현실에서 펼쳐져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들이 '아이의 장애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두렵지는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그렸으면 좋겠습니다. 웹툰 작가가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가족'이 되는 걸 거부당한 가족

가족이 되는 걸 거부당한 가족도 있습니다. 제 아이가 태어나기 전날인 10월 10일 특별한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동성 부부 11쌍이 모여 혼인신고를 받아주지 않는 구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습니다. 이 날 행사에 참여한 김조광수 감독은 '사랑은 결코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라고 말했습니다.

동성부부가 출산을 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동성부부인 김규진, 김세연 커플입니다. 김규진씨는 프랑스에서 간호사로 일했는데 규진씨가 레즈비언 커플인 걸 알고 있는 상사가 당연하다는 듯 아기를 낳을 거지?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규진씨는 이 질문에 자신을 얻어 임신과 출산을 결심 하고 벨기에에서 정자를 기증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적 부부나 사실혼 이성애 부부에게만 정자 기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규진씨의 배우자인 세연씨는 사랑하는 아이가 태어났지만 육아휴직을 보장받지 못하고, 딸 라니는 규진씨만을 자신의 법적 보호자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그랜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동성부부 혼인평등소송 시작 기자회견에서 동성부부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동성부부 11쌍은 한국의 동성혼 법제화 실현을 위해 동성부부의 혼인신고를 수리하지 않는 행정처분에 불복하는 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연합뉴스

딸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결정이라는 비난도 있습니다. 규진씨 부부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할 딸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딸을 힘들게 하는 것은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으로 아이를 돌볼 김규진·김세연 부부가 아니라 손쉽게 차별적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일 겁니다.

최근 법원도 '가족'과 국가에 관한 중요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우리나라는 부양자의 건강보험으로 피부양자의 건강보험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커플은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이 불가능합니다. 지난 7월 18일 대법원은 사실혼 관계인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국가가 개개인의 동반자 관계에 개입해 구성원의 성별 차이에 따라 건강보험제도의 보호를 부여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가치평가적 행동을 하는 것은, 국가가 개인의 내밀한 성적 지향의 발현과 형성에 개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행복추구권을 심각하게 훼손한다"라고 밝혔습니다.

비장애인, 이성애 중심의 '정상가족'만을 인정하는 기존의 국가체계로는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을 담을 수 없습니다. 23년부터 혼인 평등과 다양한 가족을 인정받기 위해 '모두의 결혼' 캠페인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다양한 가족 인정해야

우리 부부는 국가와 공동체의 도움으로 법적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서울 역세권에 임대아파트 공고가 떴고 신혼부부에게 우선순위로 공급한다고 했습니다. 예비신혼부부로 접수나 해보자고 넣었다가 덜컥 당첨이 됐습니다. 설마 임대아파트 때문에 결혼까지 해야 하나 고민하다 집이라도 한번 보자고 해서 함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랐습니다. 비밀번호가 있는 집문을 열고 창문을 여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결혼하자'고 외쳤습니다.

아이는 임대아파트처럼 국가가 보증해 주지도 않습니다. 정해진 비밀번호도 빨리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도 정해진 호수도 없지요.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저 지금 함께 사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3인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임대아파트에 법적 부부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도, 아이를 기르고 이웃들과 평화롭게 지낼 기회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할 보편적 권리입니다.

편지를 쓰는 와중에도 틈틈이 작고 소중한 아이를 보고 왔습니다.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네요. 그러다 문득 나의 아이에게만 내 시선이 머물러 버리면, 이 아이 역시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면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는 수사는 불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를 위해서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을 함께 꿈꾸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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