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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교무실에 앉아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킨 마웅쵸(30) 씨가 교무실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들이 자라서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킨 마웅쵸 씨는 이 학교의 선생님이다.

나는 버마를 탈출한 난민들이 수용되어 있는 맬라 난민캠프를 찾기 위해 7월 13일 밤 방콕을 떠났다. 다음날인 14일 새벽 4시에 7시간 걸려 도착한 매솟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매솟은 방콕에서 북서쪽 방향에 있는 버마와 인접한 국경도시다. 이 곳은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좌익게릴라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곳이고 현재도 아편을 비롯한 많은 밀수품들이 이 곳을 통해 태국으로 들어가고 있다.

내가 매솟을 향해 출발했던 13일 오전에도 버마에서 매솟으로 진입하는 도로에서 10명의 밀수 조직원이 검문하던 태국 군인을 사살하고 버마쪽으로 달아난 사건이 있었다.

매솟에서 맬라 캠프를 가기 위해서는 버마 국경을 따라 북쪽으로 약 65Km 정도 가야 한다. 태국 지방도시에서 태국 사람들이 흔히 버스라고 부르는 픽업(pick up)트럭을 타고 달리며 바라본 국경지대의 산과 들, 논과 밭은 아주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중간 중간에 태국 경찰과 군인들로부터 검문만 받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쾌적한 봄날, 강원도 깊은 산골을 달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약 1시간 30분을 달렸을 즈음에 도로 왼편으로 마치 설악산 울산바위를 옮겨다 놓은 듯한 산이 나타났다. 그 산 아래로 많은 집이 언덕과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바로 맬라 난민 캠프다.

캠프 입구에는 '태국 내무장관이 발급한 통행증을 제시하시오'라고 써 있었지만 통행증을 제시하고 통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또한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캠프는 서울이 한강을 경계로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어지듯이 캠프 중심을 가로지르는 계곡을 경계로 도로쪽과 산쪽으로 나뉜다. 계곡을 따라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약간 깊은 곳만 다리를 설치해 놓았고 대부분 계곡 양쪽에 박아놓은 두 막대를 연결한 줄을 잡고 건너게 되어 있었다.

길은 전혀 포장돼 있지 않았고 좁았다. 길 양쪽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옥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대개 채 2평도 되지 않은 규모였다. 집집마다 기둥에, 집이 자리하고 있는 구역 이름과 가옥 번호 그리고 사는 사람의 숫자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기록된, 명찰이 붙어 있었다.

이 캠프는 태국 정부와 UNHCR(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 for Refugees)이 관리하고 많은 국제구호단체가 지원하고 있다. 계곡을 따라 약 3Km에 걸쳐 형성된 이 캠프에는 현재 2만명을 약간 상회하는 난민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생활환경은 겉보기에도 매우 열악하다.

난민의 대부분은 오랫동안 버마 군부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여온 카렌족이고, 나머지는 버마 군부의 학정을 피해 국경을 넘은 소수의 이슬람교도를 포함한 버마인들이다.

카렌족은 버마 인구의 약 7%를 차지하고 있는 소수 민족으로서 버마와 태국 국경 고산 지대에 약 35만명이 살고 있다.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역사를 지닌 이들의 독립투쟁사는 버마현대사와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의 전설적인 지도자 수바 우지가 밝힌 카렌 독립투쟁 4대 원칙을 보면 '우리는 무장을 유지한다'는 원칙이 있다. 이들의 무장투쟁은 버마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이어졌고 지금 많은 카렌족이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밀려들고 있다.

불교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킨 마웅쵸 씨는 버마인이지만 카렌족의 독립을 지지한다. 그는 버마에는 약 20여개의 소수 민족이 존재하는데 그들이 독립이나 자치를 원한다면 그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웅산 수지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거의 1백%에 가까운 버마인들이 아웅산 수지를 지지한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지난 19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끈 버마 NLD(버마민주동맹)는 85%가 넘는 지지를 얻고서도 군부의 비토로 집권하지 못했다.

맬라 캠프의 난민들은 대부분 일을 하지 않는다. 이들의 생계는 전적으로 구호물자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일을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경작할 땅도 없고 캠프 이외의 지역을 통행할 자유도 없다. 이들은 태국 군대에 의해 보호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태국 사회에 접근할 수 없게 통제되고 있다. 태국 정부가 보기에 이들은 어디까지나 버마로 돌려보내야 할 난민인 것이다.

캠프 곳곳을 다니면서 본 사람들은 대개 하는 일 없이 집에 앉아 있었고 배구를 즐기는 청년들도 목격했다. 어린 아이들은 고무줄 놀이 등 자신들이 개발할 듯한 이런 저런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영양 상태가 안좋은지 얼굴이 허옇게 뜬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이들이 과연 버마로 돌아갈 희망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불교중학교 내부를 안내해준 살라 씨는 자신들이 돌아가야만 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언제가 될 것인가?

킨 마웅쵸 씨는 버마군부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버마에서 아웅산 수지가 집권하게 된다면 자신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렇게 되면 카렌족도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것이 가능하지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였다.

국제사회의 압력에 밀린 버마 군부는 최근 들어 유화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소수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아웅산 수지 측과 모종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그러나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을 오히려 강화하고 있고 태국 국경을 넘는 난민의 숫자는 이전보다 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킨 마웅쵸 씨와 살라 씨는 사진을 찍을 때 태국 군인들과 UNHCR 관계자들을 조심하라고 내게 귀띔해 주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캠프 곳곳에서 태국 군인들이 내가 사진 찍는 것을 제지했다. 통행증 제시를 요구하며 캠프를 떠나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안 찍겠다고 말하고서는 여기저기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며 느낀건대 웃는 얼굴을 한 어른이 한 명도 없었다. 아이들만이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도 진부한 말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에서 우리들의 의무와 그들의 부모들이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근거를 보았다.

14일 저녁 맬라 캠프에서 매솟, 매솟에서 다시 탁이라는 도시로 이동하면서 여섯 차례나 태국 경찰의 검문을 당했는데 여권을 보여주고 돌려받을 때마다 킨 마웅쵸 씨가 생각났다. 그는 여권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내 것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여러 나라의 비자와 출입국 도장이 찍혀 있는 내 여권을 그는 매우 부러운 눈으로 살펴봤다. 그는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다.

방콕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어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너무도 이쁜 눈을 가지고 있던 맬라 난민캠프 아이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그들의 자유와 희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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