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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왼쪽)와 오태양 씨.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에서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중인 박노자(朴露子) 씨가 지난 연말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망한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 간)을 펴냈다.

러시아 태생의 '혈통적 러시아인'이면서 99년 한국으로 귀화한 '한국인' 박 교수는 이 책에서 한국사회의 패거리 문화, 민족주의로 포장된 국가주의, 전근대적인 학원 문화 등 '어두운 한국사회의 초상'을 조망했다.

박 교수는 특히 책머리에 "아직도 감옥에 있는 모든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라는 헌사를 삽입,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병역을 거부하고 감옥을 택한 이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의 인정과 대체근무제의 도입'을 주장해온 박 교수에게 작년 12월17일 공개적으로 병역 거부를 선언한 불교신자 오태양 씨의 행동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오 씨는 늦어도 설 연휴 전 경찰 조사를 받을 예정인데, 구속-불구속 여부를 떠나서 현행법상 사법 처리를 피할 수 없는 형편이다.

<오마이뉴스>는 20일 박 교수가 오 씨에게 보낸 격려 편지를 전문 공개한다.


안녕하십니까, 오태양 님!

몇 주일 전에, 서울에 있었을 때, 한 번 택시를 탔을 적에, 님의 목소리를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라디오에서 님의 결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님과의 인터뷰를 잠깐 들려준 것이었을 겁니다. 님에게 "군대 대신에 무엇을 하고 싶나?"라고 물어봤을 적에, 님은 "독거 노인 등의 약자에 대한 봉사를 계속 하고 싶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택시에서 내리는 관계로 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못했지만, 정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사는 노르웨이에서 님처럼 총을 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고등학교 폭력 방지 상담 요원이나 북한 등의 아이들에게 음식 소포를 보내주는 적십자사 직원으로 일할 수 있는데, 노르웨이보다 학교 폭력도 심하고 북한도 훨씬 가까운 남한에서 왜 님께서 대체 복무로서 이와 같은 일들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한국만큼 사회 문제가 많고 사회 봉사자가 필요한 나라에서 가장 성실하게 봉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 대신에 감옥으로 보내는 것은, 사회로서의 자해(自害) 행위가 아닌가요?

군이나 경찰·검찰 등의 관계자들이 안간힘을 다해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방해하는 것이야 쉽게 이해되는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군의 폭력과 공포의 '문화'(사람을 모욕하고 때리는 것을 '문화'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지만, 대신 쓸만한 단어가 없습니다)에 젖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야 그들에게 편하고 좋은 것이 아닙니까?

정말 억울한 것은, '피해자'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일반 남성 병역 대상자들이, 양심적 병역 거부와 병역 기피를 동일시하여 "힘든 것을 왜 피하냐?"고 매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힘든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오지에서의 막사 생활이나 훈련 그 자체도 충분히 힘들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힘든 것'을 이야기할 때, 주된 의미는 과연 '물리적인 어려움'입니까? 아마도 아닐 겁니다.

그들이 실제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과연 "우리가 당했거나 당해야 할 폭력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신이 왜 피하고자 하냐?"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맞을 대로 맞았는데, 당신의 몸만 귀하냐?"는 저의를 쉽게 느낄 수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세상이 말 그대로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군에서의 폭력적인 분위기를 조장·유지하는 군 지도부 대신에 일체의 폭력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을 왜 탓합니까? 병역 거부와 같은 행동으로 나타내는 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강해져야 군 안에서의 자정(自淨)작용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까?

병역 거부자를 '겁쟁이'로 보는 이들이여, 폭력이라는 현상 전체에 대한 사회적인 거부 반응이 강할수록 당신들의 아들들이 군에서 '힘든 것'을 덜 느끼겠다는 진리를 제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경찰이 오태양 님을 조사하려는 것도 사회 공익 차원에서의 자해 행위지만, 오태양 님을 매도하는 자들의 행위도 자해 행위일 뿐입니다.

오태양 님이 불교적인 동기에서 병역 거부를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같은 불자로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태까지 우리 한국 불교계에서 불자들과 국가의 제도적 폭력 (군대)의 관계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없었던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군대가 가는 쪽에 쳐다보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 석가모니불, 종족·이념과 관계없이 일체 중생을 구제·구원하시는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 등의 불·보살을 염(念)하고 믿는 우리에게는, 어떻게 총을 겨냥할 '적군'이 있겠습니까? 자신과 똑같이 무명(無明)의 고해(苦海)에서 헤매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자신과 하나되는 존재로 보고 늘 사랑하고 부처로 여겨야 할 불자라면, 다른 폭력 집단(즉, 국가)이 통치하는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다른 생각을 하게끔 세뇌를 당한 중생을 어떻게 파괴의 대상, '적'으로 망상 (妄想)할 수 있습니까?

부처에게도, 부처의 깨달음을 믿고 우리 안의 부처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김정일도 이철승도 세세생생을 통해서 수행으로 악업을 소멸시키고 차차 피안(彼岸)으로 갈 우리와 같은 동료 중생일 뿐입니다. 그들이 서로를 '적'으로 망상하고 한 땅을 두 나라로 망상하고 우리와 같은 사람을 '비겁자'로 망상한다 해도, 그것은 다행히도 이미 그들의 망상이지 우리 망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김정일도, 그 밑에서 애락(哀樂)을 같이 나누는 2천만 명의 중생들도 다 똑같이 언젠가 부처 될 존재이고 이미 부처가 된 존재들입니다.

그들에게 총을 겨냥하여 쏘는 것은, 불교에서 가장 무서운 죄로 취급하는 '부처를 죽이는 죄'입니다. 아니, 꼭 불교를 믿어야 중생을 죽이는 것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알 수 있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고 가르치는 기독교를 믿어도 본질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습니까?

오태양 님의 뜻이나 필자의 뜻을, 이 점에서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불교적인 - 내지 보편적인 종교적 - 추상적 논리를 가지고 즉각적인 군대 해산이나 일체 국민의 거국적인 병역 거부를 주장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지옥에서 지옥 불을 끄라고 염라대왕에게 큰 소리를 지를 수 없듯이, 자본주의와 군국주의가 이미 지옥으로 만들어낸 우리 인간 세상에서 한 나라만의 '죽음의 공장'(즉, 군대)을 폐업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같은 지옥살이를 하고 있다 해도, 과거의 악업으로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이 서로 다 다르다는 현실도 인정해야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시켜도 노래를 불러줄 수 없는 음치, 아무리 강권해도 술을 먹을 수 없는 '체질적인 금주파' 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남들이 아무리 압력을 놓아도 다른 생명을 미워하거나 앗아갈 생각을 가지지 못하는 '기형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되지 않습니까? 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를 의존하는 사람을 달리기 선수를 만들 수 없듯이, 생명에 대한 연민이 강해 닭고기도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총을 주어 살생의 전문가 (군인)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국가가 폭력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네가 패싸움을 같이 못하면 왕따를 시키고 말 거야"를 외치는 학교의 악동과 질적으로 달라지자면, 이와 같은 '기형아들의 체질적인 이질성'을 인정하고 비폭력적인 사회 기여 방도를 열어주어야 되지 않습니까?

상관(上官)이 "저것이 적군"이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군복을 입은 또 한 명의 부처밖에 보지 못하는 '기형아들의 다름'을 인정해주는 것은, 동성연애자나 채식주의자 등의 소수자들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총을 들고 38선을 지킬 의미도 없어지지 않습니까? 남한도 북한처럼 획일주의 사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오태양 님, 필자가 보다 자세히 쓰고 싶지만, 며칠 후에 경찰에 불려 가야 할 님이 이 서한을 읽으실 여유가 있을는지 의문입니다. 불려 가시면 고초가 시작되겠지만, 님께서 이 고(苦)를 낙(樂)으로 느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님께서 님에게 고통을 줄 관료들의 무명(無明)이 깨치기 위해서 늘 기도하실 것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님의 뜻을 따르는 불자들이 많이 생길 것을, 기쁜 마음으로 예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님의 일이 어떻게 되는가를 유심히 지켜보면서, 같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 제도적 폭력이 '의무 사항'에서 적어도 '선택 사항'으로 되기 위해서. 같은 부처이자 같은 중생, 같은 동포 형제를 죽이는 훈련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대신에 노인들의 똥오줌을 치워주는 일들이 허락되기 위해서. 필요악일 뿐인 '공인된 폭력 집단', 국가가 시키는 모든 일들이 다 선(善)이라는 섬뜩한 망상이 사라지기 위해서. 그리고 먼 미래에 우리가 다른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서 역사책에서 '계급 사회의 야만 시대의 제도적 폭력의 전통'에 대해서 읽을 때, "오호, 우리 조상들이 정말 이상하고 어리석었구나!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일이 어떻게 생길 수 있었을까?"라고 놀라면서 이야기할 수 있기 위해서....

덧붙이는 글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로 태어난 박노자 교수는 사춘기 시절 북한에서 만든 영화 '춘향전'을 보고 '코리아'에 매료됐다. 학부시절 한국사를 전공한 그는 11년 전 고려대학교 교환학생으로 방한, 한국과의 인연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했다.

박 교수는 이후 경희대 러시아어과 전임강사를 역임하는 동안 박경리, 김원일 등의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했고, 다수의 한국어 논문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여왔다. 박 교수는 현재 <한겨레21>에 '박노자의 북유럽 탐험'을 격주로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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