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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
이오덕 선생 ⓒ 산처럼
이 작품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랑스 알자스의 어느 마을 학교를 무대로, 한 소년의 맑은 눈을 통해 알자스 지방의 불행한 역사와 자기네 모국어를 지키는 아멜 선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주 잘 그렸다.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을 만나 뵈면 꼭 아멜 선생을 대한 듯하다. 선생은 한자말과 외래어, 외국어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아주 고집스레 우리말을 지키고 되살리는 일에 평생 동안 온몸을 바치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일제 시대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만주 벌판을 누볐던 독립투사처럼 거룩하기만 하다. 하긴 총칼을 들고 제국주의자와 맞서 싸운 것만이 독립운동의 전부는 아니다. 붓을 들고 우리말과 얼을 지키는 선비도 그에 못지 않은 독립투사다.

우리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면 해방이나 독립으로 알고 있는데, 그 영토뿐 아니라 문화도 되찾을 때라야만 진정한 독립이라 할 수 있다. 문화의 으뜸이 말과 글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우리 처지를 되새김질 해 볼 필요가 있다.

몇 해 전 선생님을 찾아 뵙자,
"박 선생, 이 신문들 좀 보세요. '뾰족탑' 하면 될 텐데, 하나 같이 '첨탑(尖塔)'이라고 하고 있어요. 한글만 쓴다는〈한겨레신문〉조차도 그렇게 쓰고 있어요."

그 무렵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을 헐어내는 보도 기사에 대한 선생의 불만이었다. 선생은 모든 인쇄물을 예사로 보지 않고 꼼꼼히 보신다. 그런 후, 잘못된 표기나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 외국어로 적은 말은 일일이 찾아서, 글쓴이나 편집자에게 낱낱이 알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오덕 선생의 바탕 뜻은 다음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할 일은 외국말과 외국 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민주고 통일이고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는 것이 좋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3년 뒤에 이루어질 것이 20년 뒤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민주와 통일의 바탕이 아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말이 아주 변질되면 그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잘못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도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끝장이다. 또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과 남의 글로써 창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창조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나무처럼 산처럼> 표지
<나무처럼 산처럼> 표지 ⓒ 산처럼
"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한자말이요, 둘째는 일본말이요, 셋째는 서양말이다. 이 세 가지 바깥 말이 들어온 역사도 한자말 - 일본말 - 서양말의 차례가 되어 있는데, 한자말은 가장 오랫동안 우리말에 스며든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말은 한자말과 서양말을 함께 끌어들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깊은 뿌리와 뒤엉킴을 잘 살펴야 한다. 정말 이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넋이 빠진 겨레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다."


평생을 어린이 교육에 몸바친 선생님은 '우리말 우리 글 바로 쓰기' 못지 않게 사람 교육에도 깊은 생각과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또, 선생님은 생명의 존엄성과 자연 환경에도 큰사랑을 지녔다.

이번에 펴낸 이오덕의 자연과 사람 이야기 <나무처럼 산처럼>은 선생이 농사꾼 아들과 함께 충주시 신니면 수월리(무너미) 마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시면서 쓴 글을 모은 산문집으로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자연 사랑이 넘치는 글들로 엮어졌다.

사람 소리를 듣고 여는 감

사람이 떠난 빈집에 감나무는 감이 안 달린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정우(장남)가 말했다.
"사람이 살다가 떠나 버리고 빈집에 감나무가 있으면 감이 안 달리게 돼 있어요. 사람이 있으면 아이들이 그 나무 밑에 가서 오줌도 누기도 하고, 강아지도 거기 가서 오줌똥을 누고, 음식 찌꺼기도 버리고 해서 그런 게 다 거름이 되지요. 그런데 사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양분이 될 만한 게 없으니 열매도 맺을 수 없지요."

듣고 보니 아주 그럴듯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있는 집 건너편 언덕바지 험한 자리에 있는 감나무는 감도 잘 열린다. 또 우리 집에서 두어 채 건너 위쪽 노인네 집 뒷산 벼랑에 있는 감나무도 가을이면 온통 눈이 부시게 오롱조롱 감이 익는다. …… 내가 어렸을 때 바로 우리 옆집 바깥 채 앞마당 한쪽에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 앞마당은 언제 보아도 깨끗하게 쓸어져 있어서 거름이 될 만한 것이 없어도 감이 잘도 달려 익었다. 이것을 보면 아무래도 감나무가 사람의 '기'를 받아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사람의 숨소리, 사람 말소리를 들어야 감이 달린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사람 소리를 들어야 여는 감'이란 말이다. 마치 논의 벼가 '사람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고, 그 말이 참말이듯이.

파란 비단하늘, 새빨간 저녁노을을 보는 꿈

고든박골을 지키는 풍산개 '밥풀때기'와 함께한 이오덕 선생
고든박골을 지키는 풍산개 '밥풀때기'와 함께한 이오덕 선생 ⓒ 산처럼
까치가 곡식을 먹게 된 까닭이 있다. 농약을 마구 뿌려서 벌레들이 다 죽어 없어졌으니, 이제 까치가 먹을 거라고는 논밭의 곡식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농약을 뿌려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싹쓸이로 죽이는 데 아주 재미를 들였다. 그리고 개구리고 뱀이고 까마귀고 고양이고 너구리고 곰이고 닥치는 대로 잡아먹느라고 환장을 했다. 그렇게 하면서도 이런 땅에서 복을 받아 잘 살겠다고 제 자식들까지 방안에 가두어 놓고 닭이나 소, 개 기르듯이 '교육'이란 걸 하고 있으니 정말 소가 웃을 일이 아닌가? 사람이 그저 개나 소나 돼지만큼만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사람이 무슨 학문이고 철학이고 예술이고 문학이고 떠벌리면서 거짓과 속임수로 살지 말고, 저 풀숲에서 우는 벌레만큼 고운 울림으로 자연 속에 어울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이 땅 주인은 누구?

미국의 군대가 우리 땅의 가장 요긴한 자리를 차지해서 온갖 횡포를 부리고, 우리 강산을 돌이킬 수 없이 병들게 하여온 것이 이제야 자꾸 드러나서 말썽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들은 거의 모두 아직도 미국의 군대가 이 땅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더구나 나라 일을 걱정한다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그렇다. 아니 이런 사람들이 그러니까 일반 백성들이 그 말에 따라가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나라가 앞으로 통일이 되어도 미국의 군대가 당분간 그대로 이 땅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유식쟁이들의 유식한 말이다. 나는 참 도무지 알 수 없고, 어처구니가 없다. 우리 민족이 왜 이 모양 이 꼴로 되었나? 물론 미군이 당장 이 땅에서 모두 떠난다고 하면 여러 가지 불안한 정세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불안한 정세가 된다고 해서 그게 겁나서 외국의 군대를 모셔 놓고 그들을 떠받들며 살아야 옳은가? 불안한 정세는 그대로 커져서 어떤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안 일어날 수도 있다. 도리어 모든 일이 잘 풀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불안'이 두려워 마땅히 걷어치워야 할 가장 큰 근심거리, 우리 민족의 자주심이고 자존심이고 싹 죽여 놓고 민족의 얼까지 빼 버리는 이 기막힌 애물단지를 신주처럼 받들어 모시고 싶어하다니, 이게 무슨 병든 심리인가?

-책 본문에서 인용


이 책에 담긴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씀은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제 욕심만 차리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죽비와 같은 꾸짖음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날이 갈수록 외국의 문화가 밀물처럼 덮쳐와 우리 문화가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철없는 백성들은 제 나랏말보다 외국말을 더 먼저 가르치겠다고 부부 별거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사대사상에 빠진 학자나 관리들이 국제화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영어의 공용까지 주장하며 미쳐 날뛰고 있다. 이런 세태에 선생의 말씀이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남을 지라도, 나는 선생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소중한 나라의 보배로 생각한다.

이오덕 선생님, 이 겨레의 참 스승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많이 깨우쳐 주십시오. 선생님이 여태까지 해 온 일들이 바로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지금은 백성들이 눈앞에 콩과 보리도 가리지 못한 채 선생님의 가르침을 외면할 지라도, 먼 뒷날 뒤늦게 깨친 백성들은 선생님의 높은 뜻을 반드시 기리게 될 것입니다.

나무처럼 산처럼 - 이오덕의 자연과 사람 이야기

이오덕 지음, 산처럼(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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