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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겉그림
ⓒ yes24
"쭈꾸미 회는 뜨겁고 맵고 신 맛이 강해야 제 맛이 난다. 매운 맛이나 신 맛은 음식이 뜨거워야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친 것은 벌써 몇 점 집지 않아서 이마에 땀이 맺힌다. 알이 가득 찬 대가리는 입 안에 넣고 뜨거워서 씹지 못하고 얼굴들이 벌겋다."

이는 전북 변산 앞바다에 둥지를 틀고 사는 박형진 님이 쓴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소나무·2005)에 나오는 글귀다.

첫말부터 하자면, 고추 파 마늘 할 것 없이 온갖 양념 다져 넣고 쌍잠 한 술 넣은 배춧잎 속에 살짝 덥힌 주꾸미 한 입 넣어 먹으면 침이 물컹물컹 쏟아져 나오듯, 온통 먹을거리로 가득 넘쳐나는 이 책은 정말로 오지게 재미있다. 먹고 싸고, 웃고 울고, 실컷 배꼽을 잡고도 숨이 넘어가지 않을 듯한 이야기들이니 양념 넘치는 밥상 가득하듯, 긴긴 겨울을 밤새 지새워도 질리지 않을 삼삼하고 매콤하고 달짝지근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 그것도 바닷가를 앞에 두고 큰 산 뒷산을 뒤에 두고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박형진 님이 하는 말들이 모두 실감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부지깽이로 불을 지피고 밥솥에 물을 안쳐서 밥을 하고, 방도 불을 때서 데우고 또 아궁이에 고구마랑 밤을 넣고 잉걸불로 톡톡 익혀서 꺼내먹던 시절. 엿물 눌러 붙듯 잘 쪄 놓은 고구마를 껍질째 먹어야 했건만 그것을 발라먹다가 어른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필시 빌어먹을 놈이란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들어먹어야 했던 어린 시절.

먹을 게 없고 입을 게 변변치 않던 그 때에 옷 한 벌 제대로 입지 못해 며칠 밤낮을 입고 또 입으며 지내야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달라붙어 버팅기고 있는 그 이들을 잡느라 윗도리 아랫도리 할 것 없이 다 벗고 벗어서 화롯불 앞에 손톱으로 꽉 눌러 잡던 그 가엾던 시절들. 겨울이면 먹을 게 궁색한지라 고구마에 싱건지 한사발이면 제격이었던지라,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그 싱건지 일병 구하기에 제 목숨 하나 아까워하지 않고 온 통 담장 넘는 일에 한 목숨 바치고 또 바쳤던 그 시절들.

생각하면 참 좋았고 또 깊은 정이 오갔던 가히 되살려내고 싶은 추억들이 아닐 수 없다. 장독대 속에 든 싱건지를 몰래 빼내 오던 일이나 남의 밭에 있는 참외와 수박들을 서리하던 일들은 결코 잊지 못할 재미난 추억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옛날 가난한 시절에나 있음직한 일들이지 지금처럼 딱딱 자로 잰 듯한 삶을 살아가는 시대에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살림살이다. 누군가 그것을 고집하면 당장 창살에 갇힌 닭이나 새가 되는 신세를 져야 할지 모른다.

더군다나 지금은 농촌과 어촌에, 심지어 산골 깊은 동네는 물론이요 바다 근처 깊숙한 벽촌까지도 기름보일러가 만세삼창을 벌이며 활활 타오르고 있다. 발로 밟으면 나무통에 박혀 있는 구불구불한 쇠가락 사이에 벼 나락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던 그 아롱다롱 탈곡기도 이젠 박물관에 박혀 있고 온통 무법천지 콤바인들이 온 논바닥을 마구 가로지르고 있지 않은가.

밭에서 나는 것들로 손수 찧고 빻고 짜고 주물러서 만들어 먹던 메주나 장이나 고추장이나 송편과 두부까지도 이제는 장날 시장 바닥이나 대형 점포에서 한두 푼 돈만 건네면 손쉽게 구해 먹을 수 있으니 누가 말릴 사람도 없고 또 눈치 볼 사람도 없으니 모두 그 시장논리에 서서히 몰려들고 있는 형편이다. 감히 누가 삿대질 할쏘냐.

"뉘집 싱건지 맛있네 소문이 나면 허다히 도둑을 맞기도 했다. 또래들끼리 밤에 놀다가 심심하면 '야! 너그 싱건지 한 양판 퍼다 먹자.' 이러기 예사이고 주인 앞세워서 성긴지를 퍼 가면 뒤안 장독에서 여간 달그락 소리가 나도 누님인 줄 짐작하는 어머니는 누구냐고 묻지를 않던 것이다."(148쪽)

하여, 그 옛날 고향 앞바다와 고향 뒷산, 온 논과 밭에서 밥상 둘러 앉아 옹기종기 농번기 참을 나누어 먹던 그 시절을 떠올려 보고 싶거든, 여름철 비 오는 날이면 보릿대 불로 무쇠 솥에 넣어 톡탁톡탁 볶아 먹던 볶은 보리 맛을 느끼고 싶거든, 시뻘건 팥을 잉걸불 솥단지 속 물풀에 부풀려 쌀가루로 빻은 하얀 새알 같은 속살을 넣어 죽을 쒀 먹던 그 겨울철 동짓죽을 먹고 싶거든, 게다가 한가한 가을 날 비늘도 긁지 않고 구운 기름 찰찰 벅적거리며 온통 집안을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차게 했던 전어와 막걸리 한 사발에 취해보고 싶거든, 당장 이 책을 들기 바란다.

이 책은 사시사철 부족하지 않은 먹거리들로 가득 차 있으니, 이웃 사는 정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어 주고 있으니, 더욱이 그가 커서 농촌지기로 그리고 농촌운동가로 살 수밖에 없던 그 시절 이야기들도 짬짬이 들어 있으니, 가히 진수성찬 반찬거리로 어디 하나 부족함 없는 꽉 찬 밥상이나 진배없다.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 꼴까닥 침 넘어가는 고향이야기

박형진 지음, 소나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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