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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망을 펼쳐놓은 것처럼 생긴 악양.
투망을 펼쳐놓은 것처럼 생긴 악양. ⓒ 조태용
화개를 지나면 악양이 나오고, 악양의 회남재를 넘으면 청학동이 나온다. 악양에 접어든 우리는 곧바로 회남재로 향했다. 회남재는 악양 초입부터 12km 정도 이어지는 오르막길이다.

악양은 고기 잡는 투망을 넓게 펼친 것 같은 모습이다. 투망이 펼쳐진 곳에 들이 넓게 펼쳐 있고, 투망을 쥔 손에 해당된는 곳에 회남재가 있다. 우리가 있는 곳은 투망의 끝자락, 즉 봉추돌이 달린 곳에 해당된다.

우리는 8월 4일부터 며칠째 계속 걸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우리를 본 동네 할머니들은 쉬어가라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우리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수행자라도 되는 것처럼, 쉬어가라는 요청을 번번이 묵살했다.

"갈 길이 멀어서요." 사실 갈 길이 멀긴 했지만, 쉬지도 못할 만큼 바쁜 여정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아마 한여름의 열기를 뚫고 가는 도보여행자의 강인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순전히 객기였다.

그 분들의 선의를 무시하고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낮의 태양이 정중앙을 가리켰다. 더위는 마치 폭염을 담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악양면에는 식료품 가게 몇 군데와 버스 정류장, 면사무소, 우체국, 농협이 있다. 면소재지에 없어서는 안 되는 3가지(정류장, 우체국, 농협)가 골고루 있으니 면소재지로서 위상은 지키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막걸리를 판매하는 주조장도 있다.

이 면소재지의 특이한 점은 부동산이 두 곳이라는 것. 조그마한 면에 부동산이 왜 두 곳이나 있을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법이라는 경제상식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땅을 찾는 외지인이 많다는 이야기다.

투망의 한쪽 끝에서 시작한 길은 중간쯤 돌아서 다른 한 쪽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이어져 있다. 가운데에는 회남재로 향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을 사이에 두고 날줄로 연결된 마을길이 이어지고, 그 길옆엔 다랭이논이 투망의 그물코마냥 다닥다닥 걸려 있었다. 회남재로 향하는 길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삼촌, 회남재는 여기서 얼마나 걸려?" "아마 3~4시간 정도 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 빨리 걷자." 악양 초입부터 눈에 들어온 회남재를 향해 한 시간 동안 걸었지만 회남재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얼마 전, 회남재 가는 길에 포장도로를 만들려고 했으나 환경단체와 주민들이 반대해 중단됐다. 하지만 악양에서 회남재까지 가는 구간의 90% 이상은 이미 아스팔트로 덮인 상태였다. 아스팔트 밑에서 답답해하는 땅들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스팔트의 퀴퀴한 기름내와 열기 때문에 땅은 여름에 더 힘들 것이다. 땅속 생물들의 외침은 그렇다쳐도, 등줄기에서 물처럼 흘러내리는 땀줄기는 몸속 수분을 다 배출해야만 멈출 것 같았다. 조카의 몸도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우리를 본 동네 할머니들은 쉬어가라며 말을 건넸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우리를 본 동네 할머니들은 쉬어가라며 말을 건넸다. ⓒ 조태용
오후 3시. 태양은 산간마을을 폭염으로 덮어버렸다. 열기 때문에 힘이 빠져 아스팔트 오르기를 멈춘 조카는 뜨거운 아스팔트에 엉덩이를 붙였다가 풀숲으로 옮겼다. 조카는 배낭을 메고 앉아서 다리를 쭉 뻗고는 머리를 젖혔다. 더는 못 가겠다는 표정이었다.

"삼촌, 얼마나 더 가야 하는데. 너무 덥다. 방귀뀔 힘도 없는 것 같아. 이거 너무 힘들다. 아빠가 공부가 제일 쉽다고 했는데 오늘에야 그 의미를 알겠어!"

조카는 편하게 교실에 앉아 공부하던 순간을 떠올린 것 같았다. 하지만 조카는 아직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힘든 그 시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열기 때문에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여기서 벗어나면 곧 그냥 추억으로 남을 뿐이라는 것을.

"야, 얼른 가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었다. 조그만 더 가면 회남재가 나올 거야."

조카는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겨우 힘을 내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든 첫 발을 내딛는 게 힘든 법. 조카는 그 첫 발을 다시 내딛었다.

"어떤 대열의 속도를 결정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뭐긴 뭐야. 그 대열에서 가장 느린 사람이지. 우리 대열의 속도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 삼촌이 앞서 가고 있지만 속도를 결정하는 건 너라고. 알았어?" 조카는 힘없이 대답했다.

회남재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계곡이 나오고 농지가 나오기도 했지만, 마지막 언덕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 그 언덕에 오르면 길은 꺾이고, 오른 것만큼 긴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늘은 파랬다.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이 길 끝에 뭐가 있긴 한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열기도 이어졌다. 아스팔트길을 터벅이며 오르느라 몸이 후끈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길은 이어졌기에 우린 가야 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3시를 넘어섰다. 회남재의 긴 아스팔트도 이제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 막이 내리는 종점에선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아스팔트를 보수하고 있었다. 한낮의 열기를 식힐 그늘도 없는 그곳에서 포클레인은 토사를 옮겼고 인부들은 길을 치우고 있었다.

우리는 판자를 이용해 만들어놓은 갓길로 그 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인부들이 먹다 남긴 수박이 보였다. 순간 수박을 먹고 싶은 욕망이 한낮의 열기처럼 맹렬하게 솟구쳤다. 조카 녀석도 수박이 먹고 싶었나 보다. 우리 둘은 수박에서 시선을 잠시 멈췄다가, 서로 얼굴을 보고는 씩 웃으며 길을 재촉했다.

드디어 길고 긴 아스팔트길이 끝났다. 하지만 아직 회남재를 다 오르지 못했다. 정말 길다.

더위에 지친 조카. "삼촌, 얼마나 가야 하는데. 너무 덥다. 방귀뀔 힘도 없는 것 같아. 이것 너무 힘들다. 아빠가 공부가 제일 쉽다고 했는데 오늘에야 그 의미를 알겠어!"
더위에 지친 조카. "삼촌, 얼마나 가야 하는데. 너무 덥다. 방귀뀔 힘도 없는 것 같아. 이것 너무 힘들다. 아빠가 공부가 제일 쉽다고 했는데 오늘에야 그 의미를 알겠어!" ⓒ 조태용

덧붙이는 글 | 농민에게 힘을 주는 직거래 참거래 농민장터(www.farmmate.com)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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