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지금 '스타'라는 이름 위아래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스타'가 되길 원하고, 누구나 '스타'만을 보길 원하는 그런 세상. 그래서 <오마이뉴스>가 찾아 나섭니다. '스타'가 아닌 '배우'라는 이름으로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누비고 있는 그런 이들을요. <오마이뉴스>는 '배우의 재발견'이라는 타이틀로, 이곳저곳에서 작은 빛을 내뿜는 배우들을 만날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
"차화진, 이제 좀 그만 해!"
MBC 일일드라마 <밥줘>의 시청자 게시판. 차화진(최수린 분)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글은 이제 낯설지 않다. 뻔뻔하고 악랄하게 정선우(김성민 분)의 아내 조영란(하희라 분)과 그의 식구들을 괴롭히는 그녀는 누가 봐도 '국가대표'급 악녀다. 하지만 어떤 드라마든 악녀가 시원찮으면 재미가 없다. 캐릭터에 몰입해 미워하면서 봐야 드라마가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악녀 역할은 그래서 중요하다.
<밥줘>의 악녀 차화진은 뻔뻔함을 넘어 몰염치하기까지 한 딱 그런 스타일이다. 화진은 가정이 있는 남자를 애인 삼은 것도 모자라 그의 부인 영란에게 털끝만큼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료한 일상이 지겨워 기면증과 기억상실증 연기를 하며 주위 사람들을 속인다. 게다가 최근엔 영란의 남자친구에게까지 접근했다.
차화진은 지금껏 나온 드라마 속 악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여타 드라마 속 불륜녀가 최소한으로 갖췄던 도덕성조차 찾아 볼 수 없다. 비난을 받기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차화진을 미워하는 만큼 그녀를 눈에 '콕' 담았다. 확실히 그녀는 '떴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배우 최수린(35)에게 '인기를 실감하는지'를 먼저 물었다.
"예전보다 아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이젠 모자나 선글라스를 써도 다 알아볼 정도니까요. 그럴 때 인기를 실감하곤 하죠. 예전 <내사랑 금지옥엽>을 찍을 땐 식당에서 태란(이태란)이와 밥을 먹다가 등짝을 맞은 적도 있어요. 태란이는 불쌍하니 많이 먹으라고 하면서.(웃음)"'화진' 최수린이 본 <밥줘> 속 '악녀 화진'그녀가 '절대 악녀'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시작한 건 KBS2 주말드라마 <내사랑 금지옥엽>부터다. 최수린은 옛 남편 전설(김성수 분)과 그의 애인 장인호(이태란 분)를 괴롭히던 서영주로 나오면서 시청자들의 눈에 띄었다. 연속해서 두 '악녀' 역할을 너무 훌륭히 연기해낸 탓일까, 그녀에겐 유독 악녀의 이미지가 강하다. "어쩜 그렇게 능청스럽고 뻔뻔하게 연기하느냐"는 말에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고정적인 이미지로 봐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이젠 악역을 담당하는 연기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냈다고 생각해요. 제 자신도 배역을 맡을 때마다 새로운 면을 보여주려는 연기자가 되려고 노력해요. '지난번과 똑같더라'는 소리 안 듣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최근 언론에는 조강지처역(KBS <파트너>)과 불륜녀역을 동시에 해내는 최수린에 대한 기사가 뜨기도 했다. 사실, 몰입을 해야 하는 배우들에겐 상반되는 역할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최수린씨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며 악녀로 이미지 고착화 되는 걸 중화시키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파트너> 때문에 그래도 좀 나은 것 같아요. 상반되는 배역을 맡다보니, 서로 이해가 잘 돼요. <밥줘>에서는 본부인의 마음이 이해가고, 파트너에서는 불륜녀의 마음이 이해가는 거죠. 두 배역을 연구하다보면 더 얄밉게 보이는 방법이 떠오르거나, 반대로 속이 타는 본부인의 마음이 잘 표현되기도 해요. 그래도 실제로 제 남편이 바람을 핀다면 드라마 속 부인들처럼 차분하지만은 못 할 것 같아요.(웃음)"최수린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화진'이란 캐릭터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증폭됐다. 많은 시청자들이 핏대를 세우고 피를 토하며 '욕'하고 있는 '화진'을 최수린씨는 이해할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예요. 작가 선생님의 대본이 나오면 그때야 '아 이렇게 가는구나'하죠. 그래서 예측은 잘 안되지만 개연성을 갖고 연기하려고 해요. 쉽게 볼 순 없지만 아예 없는 인물이라고도 생각 안 하니까요. 대신 맞는 신이 많아서 좀 힘들었어요. 마지막엔 감독님이 맞는 신을 살짝 빼주시기도 하셨어요. 때리는 것 대신 미는 걸로.(웃음)"빼어난 미모와 정확한 발음... 왜 못 떴을까안타깝지만, 시청자들이 화진에 대해 성토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최수린씨는 "최근 마지막 촬영(58회)을 마치고 함께한 동료들과 '송별회'까지 했다"고 귀띔했다. 60회를 앞두고 있는 터라, 함께한 배우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울 법도 하다.
최수린씨는 "'대본 상 갑자기 빠지게 됐다, 이제는 서로 많이 친해지고 편해졌는데 헤어져야 하는 게 많이 아쉽다"며 "하희라씨는 항상 많이 챙겨주고 오윤아씨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많이 친해졌다, 홍춘민씨와도 친하다"고 말했다. 이어 "참 재밌는 게 성격이 드라마 캐릭터와 상당히 비슷하다"며 "윤아씨는 터프하고 여성스럽고, 홍춘민씨는 활발하면서도 겁이 많다"고 덧붙였다.
사실 '악녀'로서의 이미지를 떼어놓고 보면, 그녀는 연기자로서 훌륭한 자질을 지니고 있다. 빼어난 미모와 정확한 발음, 성우 같은 목소리가 그것이다. 특히 그녀 특유의 똑 부러지는 목소리가 도도한 이미지를 더 부각시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태 어디서 뭐하셨냐"는 기자의 농담 섞인 질문에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던 얼굴 때문이었다"며 웃음으로 답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무척 나이 들게 봤어요. 최대한 4~5살까지. 그래서 나이에 맞는 배역을 하지 못했죠. 하희라씨보다도 어린데 언니로 보기도 했고요. 이제야 제 나이로 보시는 것 같아요. 목소리는 사실 그 전에 안 좋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어요. 대학교 때 성우 시험을 봤을 때도 떨어졌고요. 어떤 목소리가 더 듣기 좋고, 말하기 편한지 많이 연구했던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배우할 거라 상상도 못 해... 손 들고 발표도 못 했는데"
의외로 그녀의 브라운관 데뷔는 빨랐다. 대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했고, 1994년 SBS 공채 1기 MC로 데뷔했다. 그녀의 동기로는 황수정씨와 조영구씨, 지석진씨가 있다.
"그 당시 저는 길이 꽉 막혔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황수정씨는 처음부터 일이 잘 풀려서 부러웠어요. '운이 트이는 사람은 따로 있구나'라는 생각도 했죠. 전 MC와 리포터로 일하다가 그런 이미지가 강해서 (이미지를 벗기 위해)잠시 공백기를 가졌어요. 드라마를 하려고 했거든요. 그 후 2001년 <불꽃>이라는 드라마에서 본격적으로 연기자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사이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어요. 엇비슷한 나이의 연기자가 연기가 무르익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초조한 거죠. '나에겐 왜 기회가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드라마도 못 봤고요." 걱정돼서 드라마도 못 봤다니, 드라마를 통해 봐오던 그녀의 차갑고 도도한 이미지와 상반된 대답이다. 하지만 그녀는 학창시절엔 조용하고 내성적인 막내였다고 한다. 지금도 카메라 앞에서 말하고 연기하는 게 신기하다는 친구가 있을 정도.
"어렸을 때는 배우할 거라는 생각도 못했어요. 굉장히 내성적이었거든요. 손 들고 발표도 못할 정도로. 지금은 사회생활, 드라마 하면서 많이 바뀐 거예요. 그래도 언니(유혜리)와 있으면 다시 그 때 성격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언니와 노는 것보다 저를 봐주는 입장이었어요. 많이 예뻐해 주고, 많이 챙겨줬어요."최근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최수린씨가 데뷔했을 때만 해도 '결혼'한 여배우는 '한물갔다'고 여겼다. '결혼을 하면 인기를 끌지 못할 것'이라는 '이상한 생각들' 때문인데, 최수린씨도 이런 '이상한 생각들'이 만들어낸 피해자였다.
"처음 소속사가 있을 땐 분위기가 그랬어요. 결혼을 하면 한물갔다는. 그래서 굳이 묻지 않을 때까진 말하지 말자 했어요. 하지만 그 후로 소속사 없이 직접 인터뷰할 땐 거짓말 할 수가 없었죠. 언니는 '왜 그런 걸 속이냐'며 '더 배역이 늘어날 수도 있다'고 충고해줬는데 그게 맞는 말 같아요. 지금은 일하면서 아이를 못 볼 때가 많아요. 친정어머니가 같이 살면서 아이를 봐주시는데, 엄마를 불러보고 싶다고 할머니한테 '엄마, 엄마'했다고 할 때는 가슴 아파요.""최수린 연기 인생은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10분, 20분, 30분…. 시간이 지날 때마다 더욱 생기 있어지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악녀 화진을 떠올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가 욕심내는 배역은 어떤 것일까. 의외로 최근 방송된 <경숙이 경숙아버지>에서 자신이 맡았던 '윤섭모'역에 남다른 애정을 보인 그녀는 "아직은 차기작이 정해진 게 없지만 앞으론 언니 유혜리와 이혜영 선배님, 김희애 선배님과 같은 고급스런 역할도 해보고 싶다"며 "내가 못되게 생겼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화장 약하게 하면 순해 보인다"고 웃으며 말했다.
'존경하는 배우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혼자 골똘히 고민하던 그녀는 딱 한명을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하면서 만난 주위 배우들 모두가 그렇다고 말했다. 최씨는 "(드라마나 영화를)하다보면 잘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다"며 "<경숙이 경숙아버지> 조희봉 선배도 좋은 분이시고, <밥줘>에서 같이 연기하는 하희라씨도 철두철미하게 연기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브라운관에 머문 그녀.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았던 시청자들이 야속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기다린 것만큼 연기에 대해 회의를 느낄 것도 같은데,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엔 급 방긋하고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갔다.
"오래 오래 연기하고 싶어요. 아직은 절 봐도 아이 엄마라는 걸 모르는 분도 계세요. 하지만 딱 봐도 '이제 아줌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제 연기 인생은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제가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드려야겠죠."
한비야씨는 "꽃 피는 때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10대에 피는 개나리 같은 사람이 아닌 늦게 피는 가을 국화 같은 사람이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결심과 경험이 모여 50, 60대엔 환하게 빛날 것이라 확신했다. 다른 연기자들보다 조금 늦게 빛을 발한 최수린씨도 이제 막 피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브라운관에서 활짝 핀 가을 국화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