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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을 시작한 지 10여 일이 지났습니다. 눈만 뜨면 매일 걸었음에도 불면의 밤은 계속됩니다. 롯지는 오후 8시가 지나면 전기가 나갑니다. 그때부터 아침까지 길고 긴 시간을 저 혼자 보내야 합니다. 피곤한 몸과 달리 정신은 밤이 깊어 갈수록 맑아집니다. 그렇지만 어두운 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잠 못 이루는 밤

히말라야 롯지는 난방 시설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침낭과 핫팩이 보온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침낭 속에 핫팩을 몇 개 넣은 후 털모자를 착용하고 침낭에 웅크리고 눕습니다. 잠자리에 들면 그때부터 세상과의 대화가 시작합니다. 매일 밤 생각지도 않은 인연이 나타나 함께 밤을 지새웁니다. 상상과 꿈을 통해 만나는 세상과의 만남은 아침이 올 때 까지 계속됩니다.

어젯밤에는 고3 아이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맡은 업무가 고3과 관련되었기에 상담을 위해 히말라야까지 찾아 온 것입니다.

"수시 합격자는 정시에 지원할 수 없나요?"
"제 성적으로 정시에서 어디를 지원해야 하나요?"
....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저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저도 아이들의 질문에 무엇인가 대답하지만 제 말은 허공에 맴돌 뿐입니다.

아이들과 대화가 끝나갈 무렵 낮 시간에는 조용히 잠자고 있던 바람이 허술한 지붕과 창문 틀 사이로 슬며시 다가옵니다. 바람은 아귀가 맞지 않은 창문과 지붕을 흔들면서 무엇인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렇지만 저는 바람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어 마음만 심란해집니다. 

아침 야크카르카의 아침
▲ 아침 야크카르카의 아침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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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무렵 숙소 뒤란을 걸어 보았습니다. 여명이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습니다. 하늘 저편에서 조그마한 불빛이 구름과 설산을 붉게 물들이고 산봉우리를 타고 제가 있는 곳까지 내려옵니다. 그렇지만 철없는 별 하나는 이 시간에도 여전히 잠들지 않고 깨어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황소걸음으로 걷기

오늘은 쏘롱페디(4300m)가 목적지입니다. 숙박을 한 야크카르카와 고도의 차이가 200m 남짓입니다. 가급적 해발을 하루에 500m 이상 높여서는 안 됩니다. 급작스럽게 고도를 높이면 고소가 올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해발 3000m를 넘어서면 모자를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체온이 머리를 통해 가장 많이 빠져 나갑니다. 급격한 체온이 감소하면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출발 야크카르카를 출발하며
▲ 출발 야크카르카를 출발하며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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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맑은 하늘과는 달리 바람이 심하게 불어 출발부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젯밤 내내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었던 바람은 아직 미련이 남은 것 같습니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황량한 대지에서 피어나는 먼지 때문에 숨쉬기가 힘듭니다. 황소걸음으로 트레킹을 시작하였습니다.

현수교 레다르 초입에 있는 현수교 모습
▲ 현수교 레다르 초입에 있는 현수교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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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을 걸어 레다르(4200m)에 도착하였습니다. 비수기라 문이 열린 롯지가 없습니다. 양지 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합니다. 저 멀리서 몇 일간 저와 함께한 강가푸르나와 안나푸르나Ⅲ가 작별의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트레킹 첫날부터 함께한 마르샹디강도 오늘 작별해야 합니다. 쏘롱라(5,16m)를 넘게 되면 지금까지 맺은 인연과는 작별해야 합니다.

안나푸르나3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할 안나푸르나3 모습
▲ 안나푸르나3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할 안나푸르나3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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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다르를 지나자 쏘롱페디(4450m)로 가는 길이 두 갈래 나왔습니다. 지름길이지만 낙석과 산사태의 위험이 있는 아랫길과, 돌아가지만 가파른 오르막인 윗길이 있습니다. 저는 지름길인 아랫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멀리서 봐도 낙석의 위험이 염려되지만 '지름길'이라는 유혹에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계곡을 건너며 레다르에서 쏘롱페디를 가기 위해
▲ 계곡을 건너며 레다르에서 쏘롱페디를 가기 위해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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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길 위험한 아랫길 모습
▲ 가파른 길 위험한 아랫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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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다르에서 두 시간을 걸어 오늘의 목적지인 쏘롱페디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늘도 오전에 트레킹이 끝났습니다. 롯지의 식당은 원목으로 되어있으며 2중으로 된 통유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쏘롱패디 모습 저 멀리 쏘롱패디가
▲ 쏘롱패디 모습 저 멀리 쏘롱패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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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많은 트레커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며칠을 머문 사람, 어제 도착한 사람, 그리고 우리처럼 오늘 도착한 사람까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곳까지 오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는데 고소 적응에 실패하면 지금까지 온 길을 되돌아가야 합니다.

고소 적응을 위하여

저도 점심을 먹고 식당 의자에 누워 휴식을 취했습니다. 롯지 주인과 한참을 대화하던 가이드가 이곳보다 400m 높은 곳에 있는 '하이캠프(4850m)'로 이동하자고 합니다. 내일 오전 쏘롱라(5416m)를 넘기 위해서는 고도를 좀 더 높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휴식 쏘롱패디 식당 모습
▲ 휴식 쏘롱패디 식당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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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캠프(4850m)로 출발하였습니다. 쏘롱페디에서 하이캠프까지 가는 트레일은 이번 안나푸르나 라운딩에서 가장 경사가 심한 곳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머리위에 하이캠프가 걸려 있습니다. 걸을 때 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며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습니다. 모두 걷는 것이 아니라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거의 두 시간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이캠프 가는 길 안나푸르나 라운딩에서 가장 경사가 심한 길
▲ 하이캠프 가는 길 안나푸르나 라운딩에서 가장 경사가 심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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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캠프(4850m)에는 롯지가 하나뿐 입니다. 롯지 식당에는 두 명의 종업원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난로를 피우자고 하자 사람이 적어 안 된다고 합니다. 이곳은 수목한계선을 넘었기에 나무를 구할 수 없습니다. 난로는 화학 연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난로를 피기 위해서는 난방비를 지불해야 합니다. 일정 인원 이상이 모여야 난로를 피운다고 합니다.

하이캠프 해발 4800m, 하이캠프 모습
▲ 하이캠프 해발 4800m, 하이캠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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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한 후 밖으로 나왔습니다. 해발 4800m 고지에 와 본 것이 처음입니다. 고소 적응을 위해 롯지 뒤편에 있는 조그마한 피크(꼭대기)에 올랐습니다. 제가 몇 일간 걸어 온 길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푸른 하늘, 하얀 설산, 그리고 메마른 계곡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틸리초 피크 모습 하이캠프 뒤편 꼭대기에서 본 모습
▲ 틸리초 피크 모습 하이캠프 뒤편 꼭대기에서 본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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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고소와 추위 때문에 침낭에서 끙끙대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불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히말라야 능선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화려함 그 자체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별빛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화장실에서 바지를 내리고 앉았습니다. 화장실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황홀함 그 자체입니다. 순간 추위도 고소도 사라져버렸습니다.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네팔#안나푸르나#안나푸르나라운딩#하이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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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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