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뷔페(1928-1999) 전시에 다녀왔다. 몇 해 전,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베르나르 뷔페 3인 전시가 열렸을 때 그의 실제 작품을 처음 봤었다.
샤갈과 달리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그는 피카소의 대항마로 불린 엄청난 화가다. 일단 그의 그림을 한번 보면 눈에 각인이 된다. 그림에 표시된 사인마저도 예술인데, 사인은 그림과 하나가 되어 작품의 품격을 높인다.
그의 그림은 빈 듯 꽉 차 있고 꽉 차 있지만 텅 비어 있다. 뷔페는 빈 작품의 여백을의도와 구도로 꽉 채워 놓았고, 빽빽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은 그 쓸쓸함과 적막함, 공허함으로 인해 오히려 텅 빈 느낌을 들게 한다.
그는 '가정은 나 몰라라' 하는 아버지와 늘 우울했던 엄마, 그 사이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어린 나이에 이미 슬픔과 절친이 되어 버린 소년은 파리의 야간 고등학교에서 데생 수업을 받고 15세에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한다.
에콜 데 보자르는 어떤 곳인가.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명문 학교, 졸업생 명단을 보면 제리코, 드가, 들라크루아, 프라고나르, 앵그르, 모네, 모로, 르누아르, 쇠라, 시슬레 등 셀 수없이 많다. 이곳은 단 한 번도 15세 청소년에게 입학을 허락한 적 없는 세계적인 명문 학교이다.
다음 해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뷔페는 혼자 남겨졌다. 오갈 데 없는 소년은 화실에서 누가 쓰다 남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부족한 물감 탓에 최대한 얇게 채색하고 그마저도 칼로 긁어냈다. 그렇게 2년 동안 미친 듯이 그림에 몰두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이 엄마를 잃어버린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뷔페는 19살에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그로 인해 파리의 화단은 술렁거렸다. 어떤 이는 그의 그림을 천재 시인 랭보에 비교했고, 또 어떤 이는 시인 로트레아몽과 비교했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비평가상'을 수여했다.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예술가들이 즐비한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이 상은 그를 단숨에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의 나이 고작 20세였다.
그의 어떤 전시회는 전시회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와 폭동에 가까웠다. 그렇게 그는 20대에 부와 명성을 다 차지한다. 성을 소유했고 롤스로이스를 몰았다.
이 그림은 뷔페가 19살에 그린 '닭을 들고 있는 여인'이라는 작품이다. 비쩍 마르고 길게 늘여 놓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그림이 발표되었을 때 파리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다들 자기가 모델인 줄 알았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는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배급을 타기 위한 줄이 이어지고 난방이 이뤄지지 않는 겨울에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몸을 붙이고 추위를 견딜 정도였다. 그러니 이 그림은 어떤 과장도 없이 현실이었다. 그를 가리켜 20세기 파리의 산증인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뷔페가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피카소와 뷔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뷔페는 뜨는 별, 피카소는 지는 별로. 어떤 비평가는 피카소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했다. 입체파나 야수파, 어떤 거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 새로운 뷔페의 열풍이 불었다. 이에 당시 60대 후반이었던 피카소는 자존심이 상하고 또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20살에 비평가상을 받고 세상은 이토록 난리인지.
뷔페의 전시에 피카소가 왔다. 피카소는 전시장에 들어서자 아무 그림도 둘러 보지 않고 곧바로 이 그림 앞으로 직진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그림 앞에 서 있다가 그대로 돌아서서 나갔다. 그리고 어떤 언급도 없었다.
피카소는 이 그림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질문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며 이 그림 앞에 관람자들을 멈추게 만든다. 피카소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천재가 천재를 알아보는 방식이 작품 단 하나면 충분했던 것'인지 단지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서인지 당사자가 눈을 감은 마당에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일화는 결과적으로 이 그림의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뷔페의 생애는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지고지순한 평생 '온리 원' 사랑, 명성의 추락,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다가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음에 좌절한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전시 후기도 아니고 그간 연재했던 '그림의 말들' 에필로그도 아닌데 말이 길어졌다. 이렇듯 전시를 보고 나면 생각이 많아지고 할 말도 많아진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게 '그림의 말들'이다. 그동안 일 년 반을 연재하면서 나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연재기사 :
그림의 말들 보러가기]
알고 있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여서, 작가 한 명에 대해 글을 쓰고 나면, 어떨 땐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무당이 접신을 하듯 나도 그 사람의 인생에 깊숙이 들어가 그가 되면서 빠져나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배우가 어떤 역할에 깊이 빠졌다가 나오면 현실로 돌아오기가 힘들다고 하는 말은 진짜였다. 프리다 칼로가 그랬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렘브란트, 나혜석이 그랬다.
몇 차례 타인이 되는 경험을 하고 나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인간의 결은 그 밑에 숨겨진 사건과 환경, 타고난 성품 등 다양한 기반에 근거하기 때문에 단숨에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성숙과 파멸의 경계를 확인하면서 성숙의 길을 택하는 게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 생각하게 했다. 또, 사회적 규범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내가 진정 욕망하는 지점은 무엇일까에 대한 많은 질문이 내 안에서 쏟아졌다.
그렇게 많은 불면의 시간을 거쳐 쓴 글들이 책이 되었다. 글을 연재하면서 많은 메일을 받았다. 책으로 나오면 꼭 연락을 달라는 고마운 메일들이었다. 그런데 내 실수로 받은 메일들이 다 지워졌다. 일일이 출간 소식을 알려드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게 돼 버렸다. 너무나 죄송스럽다.
며칠 전,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보았다. 화면에 있었던 글이 종이에 찍히면서 다른 감성이 묻어 나오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이게 종이의 힘인가.
"미술이 이렇게 재미있었어?"
"왜 우리가 학교 다닐 땐 이런 걸 말해주는 선생님이 없었을까? 그랬다면 이 재미있는 것을 더 빨리 알고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을 읽은 멀리 있는 내 친구가 보내온 문자다. 부디 모두에게 그렇게 읽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그림의 말들을 사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 베르나르 뷔페 전시 도록과 도슨트 해설을 참고해 썼습니다.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