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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이사철이죠. 이사하려면 적어도 한 두 달 전에 누구와 함께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해놓기 마련입니다.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꼭 낭패를 보기 때문이죠.

오늘(3월 2일)은 새학기가 시작되는 날. 봄과 함께 문을 연 새학기 첫날, 전국 1만여 개의 초·중등 학교도 이사를 떠납니다. 이 이사 행렬은 800만명의 학생들과 35만명의 교사들이 떠나는 아주 큰 규모죠. 이날 새로 이사한 교실에서 학생들은 교사와 함께 한해 동안의 살림살이를 시작합니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학교의 이사는 '준비되지 않은 이사'입니다.

800만과 35만명의 만남.
교실 찾기에 바쁜 아이들, 자기 짐 옮기기에 열심인 교사들.
다시 벌어지고 있는 새 학년 첫날 초등학교 풍경입니다. 긴긴 겨울방학과 봄방학을 제쳐두고 하루 이틀 전에 학년 담임발령을 내다보니 생기는 일들이죠. 벌써 이런 일이 반복된 지도 해방 이후 5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맨몸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입니다."
14년째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온 임덕연(경기 여주 이포초) 교사는 이날의 심정을 위와 같은 한 마디로 털어놓더군요. 주변교사들과 함께 학급운영연구모임을 이끌고 있는 그는 다음과 같은 원망 섞인 말도 덧붙였습니다.

"최소한 봄방학 전에라도 학년 담임발령을 내주었다면 미리 학습 자료를 준비했을 텐데, 새학기를 코앞에 두고서야 담임 학년을 알게 되니 아이들한테 미안할 따름이지요."

전국 초·중등학교에서 담임을 맡은 교사들 대부분이 임 교사와 같은 형편이라는 게 교원단체 관계자들의 설명입니다. 다행히 올해 몇몇 학교는 봄방학날인 23일 담임 발표를 하기도 했지만 아주 특이한 경우죠.

이순철 전교조 정책기획국장은 "일부 시범학교나 사립학교를 빼곤 거의 모든 학교가 담임발령과 보직발령을 새 학년 시작 직전에 내는 게 관례가 되어 있다"면서 "이에 따라 새로 담임을 맡은 교사들은 학생들 발달단계에 맞는 인성지도와 생활지도 자료를 준비할 시간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내용은 있으나 재미가 없는 수업'도 있고, '내용은 별론데 재미는 있는 수업'도 있습니다. 교단에 선 교사로서 가장 최악은 내용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경우겠죠.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어느 것 하나 누가 거저 주는 게 아닙니다. 결국 하나라도 가지려면 새 학년 시작 전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초능력 교사는 없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 펴낸 '초등학교 7차 교육과정 해설서' 167쪽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더군요.

"교육과정 중심의 학교교육 체제에서 바람직한 교사의 모습은… 학습자에 대한 특성과 실태를 자세히 파악해야 한다. 교사가 학습자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그들에 대해서 세밀하게 탐구하고 조사하지 않고서는 학습 지도를 개선할 수 없다."

분명 교사들이 새겨들어야 할 명언입니다. 그렇지만 7차 교육과정 지침서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최소한 학기초엔 '그림 속 떡'에 지나지 않는 셈입니다. 담임 발령도 내기 전에 '학습자의 특성과 실태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완수할 초능력 교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의 한 해 교육과정 총괄서라 할 수 있는 '학년교육과정 계획서' 작성 과정은 더 기가 막힙니다. 학년교육과정 계획서는 담임 배정이 안 되어있는 상태라 몇몇 부장 교사나 이전 학년 담임 교사가 만들게 되죠. 계획은 스스로 짜는 게 상식인데요.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보니 책임성도 없을뿐더러 이전 학년도 것을 베끼기 일쑤라는 게 교사들의 설명입니다.

교육과정 가로막는 담임배정

학생은 물론 학부모도 이런 속사정을 알 턱이 없죠. 참교육학부모회 신귀희 사무처장은 이런 사실에 대해 "놀랄만한 일"이라고 첫 말을 떼었습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아이들을 위해 미리 준비하려는 교사들의 소박한 바람이 막혀 있는 현실이 안타깝군요. 교육부의 7차 교육과정 설명대로 학교의 교육과정이 착착 진행되는 줄 알았는데…."

그럼 담임배정이 이토록 늦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교육청 인사담당 장학관이나 교장들은 '교원전보발령이 늦게 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으더군요. 이들은 현재 국공립 초·중등 교사들은 5년에 한 번씩 학교를 옮기는데 이 전출명령이 봄방학 기간에 나다보니 담임배정이 늦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늦은 전보발령에 따른 때늦은 담임배정. 이 악순환은 왜 계속되는 것일까요.

학교 교육을 책임진 교육부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2월 8일 교육부 고위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담임 배정이 늦더라도 학기 초 수업엔 지장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 담임배정이 늦어도 학교에서 3월 2일 정상수업이 이뤄진다고 생각하나.
"정상수업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전문성과 경력이 있는 교사라면 3월 2일 정상적으로 아이들을 지도하리라 본다."

- 그럼 늦은 담임 배정은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가능한 한 빨리 하는 게 좋은 건 사실이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정기 전보발령을 늦게 내서 담임 배정이 늦은 것 아닌가.
"그렇다. 교원전보가 빨라지면 좋겠다. 가능하면 하루라도 전보발령 빨리 내도록 시도교육청 회의에서 말하겠다."

- 정기전보발령을 늦게 내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정부 예산 문제와 지역 교육청의 문제가 복잡하게 걸려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


"3월 2일 정상수업이 목표"

"예측 가능한 행정이 되어야 해요. 우리의 목표는 3월 2일 정상수업입니다. 긴긴 겨울방학 자기 아이들 수준에 맞는 연구기회를 교사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겨울방학 전에 담임배정을 끝낸 서울 양천구에 있는 서울신원초등학교. 이 학교 고춘길(61) 교장은 지난 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겨울방학 전에 학년담임을 배정한 것에 교사들이 크게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죠.

지난해 겨울방학 직전인 12월 말. 이 학교 교사들은 평교사와 교감으로 구성된 학교인사위원회에서 제안하고 교장이 승인한 새 학년도 담임배정안을 손에 쥐었습니다. 이미 희망 학년에 맞춰 인사위원회에서 공정하게 심사한 내용이었기에 교사들의 얼굴은 밝았습니다.

겨울방학 동안 학년·학교교육과정계획도 새로 맡을 학년 담당교사와 부장들이 짠 것은 당연한 일. 대부분의 학교에서 이전 학년부장이 새 학기 교육과정계획을 짜는 모습과는 아주 다른 것이죠.

서울 대부분의 초등학교는 이와 딴판입니다. 서울 S초등학교의 경우 겨울방학 직전 인사위원들이 모여 겨울방학 전 담임 배정을 건의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담임을 미리 배정하면 학부모들의 눈총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 슬픈 일입니다.

문제는 일부 교육관료

겨울방학 전에 담임을 배정하는 일은 안 해서 그렇지 안될 턱이 없죠. 물론, 교사 발령이 봄방학하는 날 나다보니 어려움은 있지만, 학년별로 숫자를 안배하면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 신원초등학교 김철규 교감의 얘깁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이더군요.

"담임 배정을 늦게 하는 것은 교사들이나 아이들 일정보다는 행정편의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교육청도 겨울방학 전에 교사발령을 미리 내야 합니다."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담임 배정이 늦은 까닭은 단지 전보발령이 늦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겉모습은 전보발령 지연 때문으로 보이지만 한 꺼풀 벗기면 나타나는 게 일부 교육관료들의 경직된 사고죠.

교원단체 일로 몇 해 동안 줄곧 교육부와 교육청을 들락거린 김대유 서문여중 교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했습니다.

"긁어 부스럼 만들까봐 알아서 고치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전보 발령 일찍 내고 담임 배정 미리 하면 학습의 질은 높아지겠지만, 인사에 불만이 있는 일부 교사한테서 항의를 받을 수도 있거든요. 관료생활에 도움될 게 없다는 것이죠. 담임배정 시기도 앞당기지 못하면서, 교육개혁을 한다고 신자유주의 시장교육을 소리 높여 외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날 때가 많아요."

한만중 참교육연구소 사무국장도 "담임을 인성교육과 생활지도를 통해 아이들과 느낌이 있는 만남을 가질 주체로 파악해야지 행정편의주의에 따라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대상쯤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재교육 받아야 할 교육부

7차 교육과정의 시행목표를 '건전한 인성과 창의성을 함양하는 기초·기본 교육의 충실'이라고 정한 곳은 바로 교육부였습니다.

교육인적자원부로 문패까지 바꿔 단 교육부는 지난해 3월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한 '교육인적자원계획서'에서 "국가 인적자원의 개발과 활용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 인적자원 경쟁력을 세계 10위권 수준으로 제고하겠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죠.

교육부 직할 인적자원은 바로 교사들 아닌가요? 위의 계획서는 담임 배정조차 제때에 못하는 형편에서 대통령 귀만 즐겁게 하는 미사여구 노릇만 하는 건 아닌지. 교육부와 일부 학교장들은 스스로 제시한 7차 교육과정 시행목표에 나와있듯 '기초·기본 교육을 충실'하게 다시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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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의 뿌리는 바로 초등학교. 이 초등학교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를 흔드는 주범은 누구일까요? '7死 7生'으로 나눠 다루어봅니다.
이 글을 쓰는 까닭은 학교의 문제를 없애는 게 모범을 창출하는 길이란 믿음 때문입니다. 새학기를 맞아 학부모와 교사들이 학교의 발전방향에 대해 머리 맞대기를 바라는 마음도 큽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우선 눈에 보이는 것부터 찾아보자고요. 우린 혹시 생각만 바꾸면 될 일을 50년 동안 거리낌없이 해오거나 그저 지켜만 본 건 아닐까요?

앞으로 3월초까지 2~3일에 한번씩 생각해 볼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5사 5생 '학교 안 청소년 단체'는 3월 5일에 올라갑니다.

<초등교육 7사 7생 시리즈 차례>
1사=교사·학생은 배달부, 1생=소년신문 가정 구독
2사=아이들 돈으로 내는 교장단 회비, 2생=교원단체 회비는 스스로 힘으로
3사=공포의 폐휴지 수합, 3생=가정 분리수거에 맡기자
4사=3월 2일자 담임발령, 4생=담임발령은 방학 전에
5사=학교 안 청소년 단체, 5생=지역 청소년 단체
6사=있으나 마나 어린이회, 6생=어린이회를 학생자치기구로
7사=관리자의 분리불안증 7생=교육소신에 바탕한 관리자를 만들자"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말; 

학부모님들께. 
담임 배정을 늦게 했다고 해서 오늘(3월 2일) 귀댁의 자녀를 맡은 담임 교사들이 모두 엉터리는 아닙니다. 이들은 비록 몇 학년을 맡을지 몰랐지만, 방학 동안 연수를 통해 나름대로 준비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이 글을 갈등하면서도 올리는 건 조금이라도 준비된 교육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교사 개인을 욕하는 건 우리교육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듯합니다. 우선 비교육 구조와 중간 교육 관료들의 '관료주의 행태'를 고치도록 힘을 모으는 게 필요할 듯 합니다. 물론, 아주 '나쁜 교사'를 두고 그냥 지켜보시는 것 또한 잘못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알기엔 이런 교사들은 극소수입니다. 

이 점 헤아려 주세요. 

* 이 기사는 월간 말과 월간 우리교육에 실은 내용을 깁고 고쳐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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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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